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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삶의 기준점

동일성세계에서의 '실재'로서의 아버지와 '파생실재'로서의 아버지

어떤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미술치료 상담 중 다음의 풍경의 그림을 그렸다. 

밭에는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그렸는데, 마치 마지막 아라비아숫자 9자를 잔뜩 그려 놓았다.

뒤에 있는 수많은 산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넘어야 할 목표들이다. 

그런데 본인은 산을 등져 있다.

집도 꽤 규모나 구조가 좋은 편이다.

나무는 어울리지 않게 야자수 두 그루를 그렸다.

강 주변에는 돌을 잔뜩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의 핵심은 짐을 싣고 가는 황소다. 


그림 해석 


본인은 넘어야 할 산을 뒤로 한채 강 건너에 힘겹게 짐을 지고 가는 황소를 바라보고 있다.

황소는 마치 자신의 인생과도 같다.

황소는 아무리 많은 짐을 실어 나르고, 여기 물건을 저기로 옮겨주지만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짐을 싣고 가는 황소와 수많은 산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산들을 넘어야 하는데, 황소를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이 스스로 성취하고나 목표를 달성한다거나 해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청소녀는


이 청소녀의 심리는 매우 불안하다. 

그것은 강을 보면 알 수 있다.

강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돌을 잔뜩 그려 놓았다.

물이 범람한다는 것은 곧 정신증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청소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도 없으며, 오직 함께 사는 언니와 어머니와 관계할 뿐이다. 

세상과 소통하기를 두려워하며,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몰라 사람만 보면 늘 두렵다. 

그래서 이 소녀는 마치 은둔자처럼 생활한다. 


해바라기로 마지막 숫자 9로 다 그려 놓은 것은 마치 자신의 삶을 마치 '인생 2막'처럼(즉, 인생 다 산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통 해바라기라는 꽃으로 밭의 영역을 채워 그린 소녀의 정서는 일상이 '조적 상태'라는 것이다. 

해바리기는 다른 사람과는 일체 관계하지 못하는 가운데 혼자 방 구석에 쳐박혀 해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괜찮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곳곳에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고, 활기가 있어 나름 생명력이 충만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우울증 약을 먹고 있고, 가벼운 자해도 해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림 속에 있는 활기나 생명력, 그 외의 모든 좋음은 '공상'의 결과이다.

이 청소년은 공상 속에서 살며, 공상 속에서 이렇게 견실한 그림을 그려냈다.


그림 속의 결핍, 아버지의 부재   


이상의 해석만으로는 이 청소년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아이는 환상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려냈다.

이 아이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부모는 아이가 부모 존재를 인식하기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버지의 부재가 아이를 환상 속에서 살게 만들었다.

이 그림은 소녀가 아버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삶의 기준점이 뭔지를 모른 채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 결과, 이 소녀는 세상을 상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라캉이 말하였듯이, 세상에는 가부장적인 상징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지만, 아버지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 소녀는 그렇게 상징적 질서, 가부장적 질서 속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녀의 삶의 과정도 결과도 삶의 출발점, 기준점, 도덕, 윤리 개념을 가져 본 적이 없음을 알려준다.


파생 실재로서의 아버지가 필요하다

 

가부장적 상징계 질서

가부장적 사회 질서 속에서 아버지는 가부장 질서 속에서 아버지는 '실재'로서 존재한다.

가부장적 사회에 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상징계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 소녀는 상상계에서 공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실체가 사회 속에서 이데아처럼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한 가부장적 질서라는 동일성 아래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아버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가부장 질서라는 동일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동일성이라 함은, 예를 들어 유교적 사회라는 동일적 가치체계, 또는 동일적 질서를 말한다.

유교사회에서는 고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등 여러 세대를 걸쳐도 동일한 가부장적 질서라는 상징계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씨 조선 500년 동안 사람들은 세대차이 없이 살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조선시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 50년동안 세대간의 엄청난 격변을 겪고 있다.

보통 한 세대가 30년인데, 우리 사회는 50년 동안 네번의 세대차 격변을 경험했다.

유교사회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면 불효자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다.

500년동안 유지해 오던 유교적, 가부장적 상징계 질서가 최근 50년 동안 네 번의 격변을 겪어면서 상징계가 무너졌다.

유교적 상징계가 무너졌음에도 우리 사회는 크게 발달해 왔고, 그 발달 속도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으로 예측된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는 어떤 아내가 남편이 아무리 술중독에, 폭력에, 상스럽게 못한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아도 그 남편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남편 뒤에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라는 상징계가 엄연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내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상징계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천에 따라 상징계가 분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시뮬라크르 시대에 사회가 발달을 향해 돌아가는 구심점이 달라지고 있고, 아버지의 개념도 많이 달라져 왔다.




파생실재로서 아버지

어떤 사람(60대)은 어릴 때 아버지의 편애로 아버지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자기 형만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형은 좋겠다. 좋은 아버지가 있어서."


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제2의 아버지를 경험하는 소중한 체험을 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이때 하나님 아버지는 실재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파생실재로서의 아버지이다. 

'파생실재란, 동일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일성 세계의 실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실재를 말한다. 


이 사람의 아버지 경험에서 실패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질서라는 동일성의 세계에서 실패한 것이다.

이 동일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신앙이라는 또 하나의 동일성 세계를 만들어 거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 것이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편애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만들어 낸 가족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유교적 동일성 체계에 순복하였다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아들은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 아들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의 아버지를 포기하고, 파생실재로서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자신의 삶을 재편하였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가치관이 아닌, 자기 나름을 가치관을 만들어 그 가치에 맞는 여자를 만났고, 실제 아버지라는 실재와 동일시하는 가정이 아닌, 자신의 가치에 맞는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지금 그 아버지의 형제는 분열된 아버지 실재, 아버지 동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형제간에 분열되어 사분 오열되었고, 그 아들 딸의 자녀들도 그 동일성의 영향으로 거의 분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파생실재로서 아버지를 만들어 새로운 가부장 질서를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형제들 중 이 아들의 가족 만큼은 분열 없이 온전한 상징계 질서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50대 60대 부모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자녀 세대를 이해할 수 없고, 대화가 안 된다는 하소연을 한다.

아들 딸 세대가 부모를 바라보는 단절의 골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과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하면, 어른을 비난하는 중에 대번에 튀어나오는 공통된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꼰대'라는 단어이다.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나는 아버지 세대, 또는 어른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표명하는 방식이다.   


세대 차이

요즘만큼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간에 대화가 안 통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두 세대 간에는 각자가 살아가는 동일성 세계가 다른 것이다.

아버지는 유교사회의 동일성 가치 체계 아래 살아간다면, 아들은 유교적 사회와는 전혀 다른 MZ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2000년대 이전부터 유교적 동일 가치 세대는 이미 흔들려 왔다.

그래서 세대를 구분하는 명칭도 변천과정을 겪었다.


     X세대(X Generation): 1960년대 초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구의 X세대 개념을 반영하며, 경제적 불확실성과 아날로그에서 아날로그로의 전환을 경험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N세대(N Generation):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N'은 종종 '네트워크' 또는 '새로운'을 의미하며 급성장하는 인터넷 및 디지털 네트워크에 대한 세대의 친숙함과 참여를 상징한다.  

     Y세대(Y Generation) 또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N세대에 이어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을 Y세대 또는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렀다. 그들은 일과 삶의 균형과 사회 문제를 우선시하는 디지털 미디어와 가치에 능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MZ세대(MZ Generation):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친 보다 최근의 용어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를 포괄한다. MZ 세대는 소셜 미디어 사용, 진보적 가치, 개성과 진정성에 대한 강한 성향으로 특징지어진다.   


파생실재로서 아버지를 만들어내는 이대남이대녀

위에서 보았듯이, 몇 십 년 사이에 세대별 명칭이 바뀌어 왔다는 것은, 이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의 동일성 체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동일성 체계 하에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서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공통된 동일성의 가치체계로 알고 살아왔다.

모든 사회적, 가정적 상황, 모든 지식, 모든 관계적 이해를 판단하는 기준이 오직 유교적 가치관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불효자식, 호래자식, 미친놈, 쌍놈 등의 주홍글씨가 이마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위의 세대별 다른 명칭에서 보았듯이 최소한 네 개 이상의 동일성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아버지/어머니와 아들/딸 간에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이다.   

동일한 상황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상호 간에 의미 전달이 불가능한 것이다. 


위 그림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위의 소녀는 아버지를 경험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은 결과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말았다.

알 수도 없는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싶은 소속감 내지는 애착감 때문에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위 소녀는 이제 자신을 낳고 떠난 아버지를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아버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아버지라는 '파생실재'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가 바로 그 역할을 해 줘야 한다. 

이 소녀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없는 아빠보다 나쁜 아빠가 낫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술주정뱅이고, 폭력적이고, 별의 별 나쁜짓을 다한다고 해도 자녀에게는 삶의 기준점을 줄 수 있다.


  "나는 저런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지"

  

이를 공자는 논어에서 '삼인행'이라 하였고, 모택동은 '반면교사'라고 불렀다. 

초자아가 없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반면교사로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초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준점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반면 교사'로서의 아버지, '반면 초자아'가 바로 그 자녀 안에 '파생 실재'로서의 아버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재는 아니지만, '파생실재'로서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그를 자신의 삶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아버지와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부장적 동일성 체계 안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파생실재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아버지가 알고 있는 세계와 아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시대정신이 급격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아날로그라는 동일성 체계로 살았다면, 아들/딸들은 디지털 문화를 동일성 체계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는 꼰대가 되어 버렸고, 아들은 '나는 절대 아버지 같이 살지 말아야지' 하며 나름대로의 아버지 상을 만들어 냈다.

어떤 사람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차이로 말하였지만, 그 둘은 그래도 동일한 태양계를 중심으로 도는 항성이다.

지금의 아버지 세대와 아들의 세대는 그 정도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다른 우주에서 온 외계인으로 보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자기 나름의 아버지 상'이 바로 동일성 체계 하에서 실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파생실재로서 그 자체로 원본 실체적 의미를 지닌 아버지 상인 것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시뮬라시옹'이라 불렀다. 

우리는 원본이 아닌, 사본 즉 '시뮬라크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위의 소녀도 자신을 떠난 원본적 아버지에 집착하지 말고, 시뮬라크르적인 아버지를 만들어낼 필요를 스스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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