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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공격성에 부모 살아남기

청소년 자녀의 공격성에 부모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탐구자 : 부모가 청소년 자녀의 공격성에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튼튼해야 하는 걸까요? 


분석가 : 자녀의 공격성에 대해 부모의 살아남기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먼저 ‘살아남는다’는 개념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만일 자녀가 죽기를 각오하고 아버지에게 한번 도전을 했는데 아버지의 엄한 권위와 분노와 준엄한 훈계로 자녀를 초토화시켰다면, 그 아버지는 자녀의 공격성에 살아남지 못한 것입니다. 좀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 상황은 세대교체라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그 아버지는 세대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탐구자 : 어머니도 유아기 때 아기로부터 살아남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분석가 : 그렇죠. 어머니와 융합상태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깨물지만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하지 못하는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젖이 아기 자신을 깨문다고 생각하게 되죠. 


탐구자 : 그래서 대상인 어머니가 유아의 공격성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유아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되는 것이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유아의 공격에 살아남는다면, 어머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모든 성질들은 유아의 주체를 형성하는 데 공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파괴하는 결과, 유아는 어머니와의 대상관계에 머물지 아니하고 대상 사용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이 대목에서 좀 이해하기가 난해해지는 군요. 어머니를 파괴함으로써 유아가 대상관계에 머물지 않고 대상 사용능력을 획득한다는 것 말입니다. 


분석가 : 요즘 원전 해체 연구소가 생기는 것 같더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원전설치 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하더군요. 일본도 우리보다 한 수 아래의 기술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원전해체 사업에 다른 나라 기업이 참여를 하게 된다면, 그 나라는 원전 설치 기술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유아가 공격성을 가지고 어머니를 파괴한다는 것은 어머니 존재 요소가 가진 성질들을 다 가져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어머니의 존재 요소의 성질을 가져 옴으로써 유아가 얻는 유익이 뭔가요?      


분석가 : 유아는 어머니의 존재 요소의 성질을 가져 옴으로써 대상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고, 이 대상사용능력은 아기가 나중에 커서 어머니 외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원전해체사업에 참여한 중국기업이 해체 작업 경험 덕분에 탁월한 원전을 수없이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유아가 어머니 파괴 경험을 통해 대상사용능력을 획득함으로써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유능하게 관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탐구자 : 그러면, 그런 파괴 경험을 통해 ‘대상관계에서 대상사용능력으로 변화’는 무슨 의미인가요? 


분석가 : 만일 유아가 어머니를 파괴하는 공격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유아는 어머니를 내면화하여서 내적 대상관계를 만들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인 것이죠. 임진왜란 때 도공으로 끌려갔다가 지금까지 도공을 기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가문이 있습니다. ‘심수관’의 가문이지요.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별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공식적으로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아들의 이름이 똑같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후손이 14대 심수관이죠. 그 가문은 조상의 기술과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겠죠. 대상관계에 머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원리, 아버지의 원리, 어머니의 원리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변화가 급격하게 요구되는 시대에는 부모의 원리만 가지고 살아가다 가는 도태될 수 있습니다.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부모를 파괴하고 부모를 넘어섬으로써 가능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탐구자 : 대상 파괴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대상으로 삼아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각각 ‘부친살해 환상’과 ‘부친살해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군요.                               


시간 체계의 차이

               

부모의 시간체계 :  과거 - 현재 - 미레 

자녀의 시간체계 :           과거 - 현재 – 미래         


 분석가 : 위의 시간 체계를 보더라도, 요즘 부모가 자녀에게 부모의 가치관을 심어준다거나 훈계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대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각각 사고하는 내용이나 사고방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기본적인 가치관을 잡아 줄 수 있을 뿐 세세하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자녀들과 관계가 어그러지기 십상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느라 자칫 자녀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지 못하고 부모의 현재로 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체계를 한번 잘 보세요. 만일 부모의 훈계를 듣고 그 훈계대로 살아간다면 그 자녀는 자신의 과거에 살아가는 셈이 됩니다. 


탐구자 : 부모와 자녀는 동일한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군요. 


분석가 : 그렇죠.  마치 작가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 차원과 작품 속에서의 시간 차원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부모의 시간차원과 자녀의 시간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체계를 살아간다고 할 때, 부모의 현재는 자녀의 과거가 되는 것이지만, 부모의 미래는 자녀의 현재가 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시간대에서도 부모와 자녀는 각각 다른 시간 차원에서 살아간다고 봐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강압적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현재에 굴종시킬 때, 저항하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때 그 자녀는 자신의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사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녀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열어가는 현실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유교적 세계관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세계관으로 IT세계를 살아가는 자녀를 유교적 세계관으로 묶어 둔다면 자녀는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 부모 자녀 간의 세대차는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모든 자녀든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주어진 현실이 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구자 : 각자 자신의 현재를 살아간다면 부모 자녀 간에 대화는 불가능하겠어요. 


분석가 : 부모는 자신의 미래를 자녀의 현재를 통해 봐야 100세 시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60대이고 자녀가 20대라면 부모가 앞으로 40년을 의미 있게 살아갈 가능성을 자녀의 현실 속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부모와 자녀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상호 세대차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탐구자 : 1980년대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만일 30대가 되어서 직장 생활을 한다면, 내가 배우고 넘어서야 할 경쟁자는 40대였다고 합니다. 40대의 경쟁자는 50대였습니다. 자기 윗대 선배에게서 배우고 경쟁하면서 10년 후에는 그들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로망이었죠. 그런데 50대가 되면 60대가 경쟁대상이 될 수가 없겠군요. 


분석가 : 바로 그겁니다. 50대, 60대, 70대가 되면, 배워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자기 윗대가 아니라, 30대이고 40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버지들에게 미래가 없고, 100세 시대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50대가 넘어가면, 오히려 자녀의 경쟁력과 창의력을 배워야 남은 여생을 2 모작, 또는 3 모작으로 새로운 세대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청소년기 내지 청년기 자녀의 공격성에 살아남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유아기에는 유아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어머니 사정을 보지 않고 마구 빨아댐으로써  공격하고 파괴하고 해체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나고 함으로써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친살해를 감행하는 청소년 자녀의 공격에 살아남는 아버지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하면 처음에는 엄청나게 분노하지만, 차츰 분노의 수위를 낮춰가면서 자녀의 공격을 받아 냄으로써 아버지는 파괴되고 해체되기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초라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넘어서는 아들은 이제 자신의 공격성으로 파괴된 아버지를 돌보고 아버지가 파괴됨으로 노출하는 연약함과 우울함, 그리고 보잘것없음을 덮어주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부모 공경’이 나오는 겁니다. 


탐구자 : ‘부모 공경’이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들은 부모 공경은 아버지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배웠거든요. 


신학자 : 때로 성경 말씀 속에 별도의 시간 개념을 집어넣어야 해석이 제대로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의 7일간은 물리적 시간으로 계산하면 130억 년이 넘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역시 원수에 대한 미움을 즉각적으로 거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수를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용서할 수 없는 동기들을 극복해 가는 긴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2장에서 가족이 원수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수 같은 부부 관계를 극복하는 데에는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어요? 부모 공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즉각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 기나긴 관계 여행을 함께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하고 파괴, 해체함으로써, 아들은 정신과 신체의 간극을 메우고 높은 자존감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런 아들은 중요한 대상과 권위를 놓고 싸워냈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사람에게 갈등 상황이나 싸울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거나, 피할 길을 찾아가든가 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와 건강한 싸움을 싸워낸 아들은 성숙한 가족 관계 경험을 하게 되고, 외부 세계에 나아가서 어떤 난관을 만나든지 뚫고 나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관계에서 대상사용능력으로 넘어가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탐구자 : 부모 됨, 아버지 됨, 어머니 됨, 자녀 됨의 의미가 매우 새롭군요. 그런데 과연 어떤 부모가 이런 것을 알고 자녀를 양육할 것이며, 자녀는 이것을 어떻게 알고 부모와 갈등을 겪어낼 수 있겠습니까? 


 분석가 : 그래서 좋은 부모 되기, 좋은 자녀 되기 위해서는 모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부모 자녀 관계는 매우 자연스러운 관계인데 공부를 해야 한다니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닌지요 

 

분석가 : 사람이 학교 공부 외에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임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죠? 


탐구자 : 그럴 겁니다. 


분석가 :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관계이고, 부부 관계, 부모-자녀 관계인데, 다른 공부는 다 하면서..... 그래서 독서도 하고 예술도 하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자연 그대로에 맡기고 공부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문의 내력, 부모의 잘못된 관계는 그대로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것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탐구자 : 물론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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