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뱀이 나의 콧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뱀은 프로이트에게는 종종 성적 에너지(리비도)의 상징이며, 융에게는 자기(Self) 또는 무의식의 원초적 힘을 의미한다. '새끼 뱀'이라는 점은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그러나 잠재력을 지닌 리비도나 감정 에너지를 뜻할 수 있다.
코는 외부 세계와의 감각적 연결, 즉 삶의 숨결(breath)을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이는 곧 자기 존재의 중심에 어떤 것이 들어오고 있다는 상징이 된다. 이 코에 뱀이 들어온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로는 억압된 욕망이나 트라우마 또는 긍정적 의미로 새로운 생명력으로서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감정이나 에너지'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꿈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생명력, 즉 욕망과 감정이 내적 삶의 중심으로 스며들고 있으며, 이를 억압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상징이다. 이 감정은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유적이며 자기 성장으로 이끄는 에너지일 수 있다.
놀랍고 불쾌하면서도 어딘가 강하게 각인된 이 이미지 속에는, 무의식이 보내는 깊은 상징이 숨어 있다. 뱀은 예로부터 두려움과 생명, 지혜와 유혹, 트라우마와 재생을 동시에 담고 있는 양가적인 상징이다. 성경 속에서 뱀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유혹자이지만, 광야에서 모세가 들어 올린 놋뱀은 고통 속에서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신비한 존재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해석에서도, 뱀은 때로는 '성적 에너지'를, 때로는 '무의식적 두려움이나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 뱀이 단지 주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코’라는 통로를 통해 몸 안으로 침투했다는 점이다.
코는 단순한 호흡 기관이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숨(breath)’은 ‘루아흐(ruach)’이며, 이는 곧 ‘영(spirit)’을 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창세기의 장면처럼, 코는 인간이 생명을 받는 자리이자 영이 깃드는 통로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단순한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내면의 가장 깊은 숨결에 영향을 주는 변화의 조짐으로 읽힌다.
이 꿈 주인은 오랜 시간 감정 표현을 억누르고, 신앙과 현실의 균열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분이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일이 항상 조심스럽고,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졌던 그에게, 이 ‘코로 들어온 뱀’은 아주 낯설고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당신이 두려워했던 것과 닮았지만,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이것이 바로 치유다. 치유는 언제나 예쁘고 따뜻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뱀처럼 낯설고, 두려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낯선 존재가 당신의 호흡 안으로 들어올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나는 이 꿈을 묵상하며, 꿈주인이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느꼈다. 억눌러진 감정이 생명력으로 바뀌고, 지나치게 순응적이던 자아가 진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한 마리씩 ‘작은 뱀’이 있다.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코로 들이쉬며 내 안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나와 만난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장 7절)
코는 하나님의 숨결, 곧 '성령(루아흐)'이 들어오는 통로다. 내담자의 꿈에서 뱀이 코로 들어온다는 장면은, 단순히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어떤 ‘내면의 변화와 생명의 자극’이 깊숙이 들어오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억눌러졌던 감정, 차단되었던 본능, 그리고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졌던 살아 있는 에너지가 다시금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이때 그 뱀은 사탄의 얼굴이 아니라, 모세의 놋뱀과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의식은 때때로 우리가 두려워하던 형상을 빌려와 우리를 일깨운다. 하지만 그 형상이 하나님 손에 붙들릴 때, 그것은 회복의 문이 되고, 살림의 도구가 된다.
이 꿈을 치유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매우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은 기독교인들 중 뱀이 곧 사단이라는 등식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일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로 하와를 유혹한 장본인이 바로 뱀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징표로 시간만 나면 산에 올라가 뱀을 잡아 죽이는 사역을 했다. 그것은 무지함에서 나온 발로임을 독자들은 능히 짐작하게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뱀을 양가적 측면을 보이는 대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다.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백성은 회개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놀랍게도, ‘구리로 만든 뱀(놋뱀)’을 장대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게 하라'는 것이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아났더라.”(민수기 21:9)
모세의 놋뱀 이야기 안에는 뱀이 치유와 회복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깊은 상징적 전환이 담겨 있다. 여기서 뱀은 더 이상 유혹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 구원의 표적이 되었다. 예수도 자신을 상징하는 표적으로 모세의 놋뱀을 거론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그들이 두려워했던 뱀을 사용하셨다. 즉, 두려움의 상징이 치유의 상징으로 전환된 것이다.
치유의 상징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구급대원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