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고결한 사람
니체는 도덕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으로 나누었다. 이 구분은 단지 철학적 범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태도, 그리고 영성의 깊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도덕의 전형으로 보았다. 그는 고결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주체적으로 “나는 이것이 좋다, 저것은 싫다”라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인도덕’이라 말했다. 반면 약한 자들은 강한 자를 비난하고, 그 비난 속에서 스스로의 착함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도덕을 구성하는데, 그것이 ‘노예도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니체가 비판했던 바로 그 기독교—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노예도덕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오히려 주인도덕을 가진 자들, 곧 스스로를 고결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가 주인도덕을 가질 수 있지만, 주인도덕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고결한 자가 아니다.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자들 중에는 주인도덕을 가졌지만 비열한 자도 많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으로 고결한 자는 스스로 낮아짐의 위치에 처해보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들을 환대하며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자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주인도덕을 가지고 스스로 <존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차원이 다른 비열한 자리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주인도덕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주인도덕에 속한 자들 중에 죄의식이 없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거나, 자라면서부터 너무 많은 특권 누리기에 노출되어 있었다거나 할 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함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성경에서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결한 직무의 자리에 았어 왔기 때문에 골고다 언덕 위의,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십자가 앞에서, 저주받은 나무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늘날에도 너무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서 상처 없이 귀하게 대접받으며 지내 온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 상담자가 될 수 없다. 상담을 공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삶의 고통과 상처를 통해 ‘치유자’의 길로 들어선다.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받았던 지점에서 다른 이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상처 없는 고결함은 공감의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 고결함은 인격이 아니라 ‘상태’ 일뿐이다.
주인도덕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일정한 ‘존엄함’과 ‘기품’을 유지한다. 문제는 그 고결함이 자신 안에만 머무를 때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신격화하면서도, 동시에 국민을 극한의 굶주림 속에 방치한다. 이는 자신의 고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비천하게 만들어야 하는 전형적인 주인도덕의 그릇된 방향이다.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중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나 관점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노예도덕이 너무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문제라면, 주인도덕은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그런 이가 ‘갑’의 자리에 오르면 쉽게 갑질을 하게 된다. 자신이 권력자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런 문제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중간관리자로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독가스실의 설계와 효율적인 수용소 운영을 담당했으며,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눌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책임을 부정하는 데에 너무나도 당당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감옥에서 간수에게 책을 요청했다. 그때 간수의 눈에는 그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갖지 못한 비열한 인간이라는 생각으로 3류 로맨스 소설을 갖다 줬다. 아이히만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 않으며 즉시 책을 반납하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철학서적을 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주인도덕을 갖춘 자로서 ‘지적으로 고결한 자’로 여겼고, 천박한 대중문화를 경멸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고결함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 철저히 결여된, 비인간적인 고결함이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결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철저히 ‘낮아짐의 자리’에 서 있었고,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은 낮은 자리를 ‘천박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신이 ‘혁명의 혈통’이라는 신화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정권을 세습받은 이후 스스로를 ‘절대적인 존엄’으로 상징화했다. 그는 통치 내내 주체사상과 반미자주노선을 앞세우며 북한 내부에서 유일무이한 권위와 명예, 즉 주인도덕의 정점에 군림해 왔다. 하지만 그가 발휘하는 이 주인도덕은 고결한 주체의 자질을 내포하지 못한, 함정에 빠진 왜곡된 주인도덕임을 드러내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 아래는 그 사례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상세히 서술한 것이다.
김정은은 ‘수령의 권위는 태양과 같고, 인민은 그 빛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북한 특유의 수령론에 따라 자신을 절대적이고 비교불가한 존재, 곧 <존엄>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그가 연설할 때조차 인민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자아반성을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형식적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고립된 권력의 탑 위에서 인민을 바라보는 시혜자의 시선을 유지한다.
이것은 주인도덕의 가장 큰 함정이다. 진정한 고결함은 스스로 낮아지고, 다른 이들과 존재를 나누는 능력에서 나오지만, 김정은은 자신을 무오류의 상징으로 신격화하면서, 인민 대중을 도구화하고 있다. “나는 인민의 아들”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진정으로 민중과 같은 처지에 처해본 적도, 고통을 나눈 적도 없다. 그는 단지 ‘아랫사람들을 위하는 고결한 주인’처럼 연기할 뿐이다.
김정은은 정권 초기부터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고, 이복형 김정남을 해외에서 독극물로 암살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의심이 가는 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함으로써, ‘주인은 결코 도전받아선 안 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이는 고결한 주인이라기보다, 두려움과 비열함에 기반한 주인도덕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진정한 주인도덕은 타자의 존재와 시선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김정은은 자신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이 허상임을 반증하는 결과를 자초했다. 이는 강인함이 아닌 불안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반응이며, 그가 주인도덕의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 주인도덕의 함정에 사로잡힌 인물임을 보여준다.
고결한 자는 타자의 고통과 결핍에 공감하고, 함께 낮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김정은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북한의 국경을 완전히 폐쇄하고, 외부와 단절시킨 채 국민들을 통제하고 고립시켰다. 수많은 인민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 자신의 위신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그가 국민과 삶을 함께 나누는 환대의 주체로서의 고결함과는 거리가 먼, 고립된 주인으로서의 권력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한 주인은 공동체의 고통 앞에서 낮아지고, 울 수 있어야 하며, 때론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김정은은 결코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며, ‘인민의 고통’을 단지 체제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결국 김정은은 주인도덕을 외형적으로는 갖추고 있으나, 그 안에 담겨야 할 고결함과 환대, 겸허함을 결여한 채 자기 우상의 함정 속에 빠져 있다. 그는 인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만 서 있을 뿐, 인민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위해 타인의 생명과 진실을 희생시키며, 주인도덕을 ‘전능한 폭력의 이름’으로 이용하고 있다.
김정은이야말로 주인도덕이 진정한 고결함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빠지는 함정의 전형이다. 고결함은 자리의 고하에 있지 않고, 낮은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김정은은 오직 ‘절대적인 자리’에만 서 있으려 한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가장한 허상의 권력자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인도덕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결한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동시에 타인의 아픔에도 깊이 공감할 줄 안다.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돕고, 권력을 가졌지만 권력 없는 자를 이해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권위와 품위를 갖추되, 자신보다 낮은 자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오면서도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한다. 그는 주인도덕의 품위를 갖추되, 그것이 단지 태생이나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며 만들어낸 인격의 깊이로 자리 잡는다. 이런 사람은 훌륭한 상담자, 리더, 스승이 될 수 있다.
헨리 나웬은 이런 이들을 두고 **‘상처 입은 치유자’**라 불렀다. 자신의 고통을 도피하지 않고 직면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진실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도덕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등의 태생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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