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에 대해 문외한인 어떤 은사자는
"상담이 왜 필요한가? 기도하면 되지. 교회에는 그런 인본주의가 들어오면 안되는거야"
라며, 상담의 영역 자체를 인본주의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기도해서 증상이 완화되거나 낫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기도면 다 된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마음의 병이 기도로 낫게 되는 경우, 은사자의 능력으로 낫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상담을 통해 낫게 되는 경우 등 우리는 모두를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당사자의 믿음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정말로 행함과 믿음이 일치하는 경우, 믿음에 걸맞는 행함이 있음으로 인해 가족 관계,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 사회적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만, 당사자의 믿음과 별도로 은사자의 특별한 능력에 의해 치유가 되는 경우, 그 치유는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반드시 재발이 되는데, 그렇게 재발되면 처음의 증상보다 더욱 심해 지는 경우도 맞을 수 있다.
만일 재발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치유는 되었을 지언정, 기존의 증상으로 인한 인격 발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늘날 상담을 필요로 하는 이유 중에는, 그러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이 표면화되기까지 그 사람의 무의식 세계는 그동안 문제가 있어 왔다는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그 결과 증상 뿐만 아니라, 관계적 어려움도 겪어야 한다. 이런 경우 증상의 의미는 그동안의 결핍과 트라우마, 콤플렉스 등을 해결하라는 내면의 요청일 수 있다.
사람의 영적인 문제는 반드시 정신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정서적 관계에 왜곡이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결핍이나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이다. 정서적 관계의 왜곡이나 트라우마, 결핍 등은 일상에서 심리적 전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은사자들은 영적 전이를 일으키거나 받아들인다. 그래서 영적으로 일어나는 은사의 측면과 심리적 전이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 은사가 내면의 결핍의 문제, 트라우마 또는 콤플렉스와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결핍이 심하거나 심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거나 또는 모종의 콤플렉스의 문제를 심각하게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런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진리에 가까이 가기가 힘들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그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힘든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방법이 바로 은사라면,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오셨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은사란 결핍이나 트라우마 또는 콤플렉스에 대한 일종의 '영적 방어기제'아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은사자들 중에는 그 은사를 가지고 교회 내에서 별짓을 다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은사자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내세워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추종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만일 교회 내에 이런 은사자가 여러 명 있으면,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들끼리 파벌을 만들고, 심지어 은사자들끼리 또는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 간에 경쟁구도를 만들어내는 경우까지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 말씀 사역자인 목회자를 향해 은사의 능력으로 저항하기도 하고, 말씀 사역보다 은사를 우위에 놓음으로써 성도들 간에 분열을 시키는 경우도 많다. 마치 자신만이 하나님의 남다른 은혜를 받는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심지어 목회자조차도 자신보다 영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다고 판단해 특별한 대접을 요구하기도 한다.
은사로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 은사가 들어오는 통로가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고, 은사를 받은 이유가 자신의 콤플렉스나 상처와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반면, 내가 아는 목회자 중 어떤 이는 이런 은사와 영적 민감성이 자신의 약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심지어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전이를 매우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전이가 예민하다는 것은 심리적·신체적 경계가 매우 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상담을 하지 못하고 목회에 전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이와 만나기로만 되어 있어도 그 사람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가 이미 전이되어 자신에게 들어온다. 그 만남 속에서 그는 내담자의 콤플렉스, 상처, 우울함, 분노, 슬픔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심리적 쓰레기통’이 되어준다. 그리고 내담자는 그런 상담자를 만난 뒤엔 속이 시원해지고, 삶이 개선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런 사람이 상담의 일을 계속한다면, 내담자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정작 자신은 상담이 끝난 뒤 내담자가 투사하고 간 심리적 짐에 오염될 수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심리적 쓰레기에 감염되어 상담 이후 몸져눕는 경우가 발생한다. 반면 내담자는 바로 이런 전이를 통해 자신의 그날의 문제를 상담자에게 떠넘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간다. 이 내담자는 그 상담자만 만나면 자신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업그레이드되는 체험을 하게 되니까, 자주 만나기를 원한다.
신앙적으로 특별한 은사를 받는 사람은 자아의 상태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은사와 각종 능력을 주시는 형태로 그 사람의 취약함을 보완한다. 만일 그런 사람이 신앙인이 아니라면, 그는 신을 받아 무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아가 취약하다는 말은 현실을 전혀 살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을 잘 살아가다가도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와의 관계가 취약하다는 말이다.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뿐 아니라, 집단 무의식으로 나뉜다. 취약한 자아는 특히 집단 무의식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클 때, 자아의 영역에 범람하는 일이 발생한다. 건강한 사람은 무의식의 세계가 아무리 크고 강력한 역동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자아가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의 가문에 대대로 넘어오면서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이 되어 왔다면, 또는 그런 문제들을 대를 이어 외면해 왔다면, 집단 무의식은 자아가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가문 내의 누군가의 의식 세계를 덮어 버린다. 이런 상황을 사람들은 신이 내렸다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집단 무의식이 의식에 범람하는 사람은 평소의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점쟁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군가가 고객으로 영업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 고객의 무의식 상태를 순식간에 파악해 낼 수 있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에도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초월적인 능력이 신앙인에게는 은사로 나타날 수 있고, 일반인에게는 신을 받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한때 무당이 될 뻔했다고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목회자 중에도 그런 심리적 상태가 계기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은 물론 투시 능력, 친리안같은 능력 등 성경에도 없는 은사까지 받는 경우를 경험한 사람도 있다. 그는 "그때 만일 하나님을 만나지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상무당이 되어 있을 거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처럼 '자아가 취약하다'는 것은 현실을 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의식 세계와의 경계가 약하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 '자아가 취약하다'는 것은 현실을 못 산다는 뜻이 아니라, 무의식 세계와의 경계가 약하다는 뜻이다. 대를 이어 누적된 집단 무의식(집단 무의식은 꼭 대를 이어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이 자아의 경계를 넘어설 경우, 그것은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신을 받아 무당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은사를 받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무의식의 범람을 견디기 힘들어 산에 들어가 도인을 만나 도를 닦는 형태로 감내를 하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면서, 온갖 은사들을 다 받게 되었다. 그는 그런 은사도 버거워서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형태로 신앙의 중심을 잡아 갔다. 그러는 중에 은사는 떠나갔고,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중심을 잡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친구는 여전히 취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으니, 투사적 동일시에 취약하고 심리적 문제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영적 전이를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친구는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지하철이나 백화점 같은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린다. 만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나 심리적 상태가 그대로 자신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