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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빨간지갑>(엄연화)의 그림자(2)

세대를 잇는 '동체성'의 고통과 치유의 시작

다음은 <빨간 지갑>의 줄거리]에 이은 두 번째 글이다. (서명: [도시의 정령들], 엄연화


어머니와의 동체성: 대물림된 고통의 그림자


해인은 자신의 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내면의 고통의 실체와 마주한다. 딸의 눈 주위의 다크서클, 숟가락을 들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 유난히 긴 목덜미.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딸의 모습에서 여덟 살 때 자신을 두고 세상을 떠나 간 어머니의 이미지를 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신체적 고통—구토, 어지럼증, 그리고 위암 초기 진단—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이는 어머니가 살아생전 겪었던 고통의 반복이며, 해인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감정의 신호다. 어머니는 아편을 맞아가며 담배를 갈구했고, 담배 연기와 비타민 냄새는 해인의 감각 기억에 응고된 고통의 자국으로 남아 있다.

해인 역시 담배를 피운다. 이 습관은 단지 어머니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결과다. 고통을 다루는 방식이 세대를 따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해인은 묘한 후련함과 함께 깊은 죄책감을 품었으며, 무려 25년간 그녀를 ‘엄마’가 아닌 ‘그 여자’라고 불렀다. 어느 날, 딸이 부르는 "엄마"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며 마치 이명처럼 윙윙거리며 귓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는다.

'엄마'를 '그 여자'로 부른 것은 엄마와의 감정적 단절의 시도였으나, 오히려 마음 깊숙한 곳에 분노, 두려움, 그리고 미해결 된 이별의 상흔을 고착시켰다.


어머니-딸의 동체성 상징: 빨간 지갑


빨간 지갑은 모녀간 동체성을 상징한다. 동체성이란, 엄마와 딸이 '한 몸 - 한 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한다.


빨간 지갑은 어머니와의 과거 기억과 트라우마의 연결고리이다.

해인은 암 진단 후 구매한 새로운 '빨간 지갑'이 '어머니의 낡은 빨간 지갑을 닮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지갑은 해인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으나 열 수 없었고, 결국 돌멩이로 부숴버렸던 기억 속의 그 지갑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낡은 지갑 속에서 어머니와 낯선 남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해인이 느꼈던 구토감과 분노는 어머니에 대한 해인의 혼란스럽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상징하며, 새 지갑이 이 트라우마틱한 기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이는 어머니의 비밀과 감정적 부재가 해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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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통한 '텅 빈' 감각의 대물림

해인의 딸은 해인이 새로 산 빨간 지갑을 보고 "짜가 명품"이자 "텅 비어있다"라고 비난한다. 이는 해인 자신의 내면적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반영하며, 해인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텅 빈' 감각이 딸에게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슈퍼마켓에서 해인이 이 빨간 지갑 속 카드로 결제를 시도하지만 카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은 해인이 현실에서 겪는 무능력감과 혼란을 심화시킨다. 이는 또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감정적 '빚' 또는 '결핍'이 해인과 딸의 현실 속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은유한다.


치유와 깨달음을 향한 상징적 행위

해인이 빨간 지갑을 컴퓨터 자판기의 엔터키 위에 던지자, 화면에 해인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들이 나타나며 내면의 혼란과 죽음으로의 도피 욕망을 보여준다. 이는 지갑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해인의 무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지갑을 던지는 행위는 억압된 내면을 터트리려는 해인의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딸과의 극적인 대화와 딸의 품에서 느끼는 안도감 이후, 해인은 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행위를 통해 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동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를 한다. 빨간 지갑이 상징하는 과거의 그림자를 직면함으로써, 해인은 비로소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치유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처럼 '빨간 지갑'은 해인의 심리적 여정 전반에 걸쳐 어머니와의 미해결 된 트라우마와 딸에게로 전이되는 감정적 유산의 연결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단순히 외모나 행동의 유사성을 넘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와 '융합적 동체성'의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인은 딸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신 또한 어머니에게 느낀 고통이 딸에게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으며,


"그렇게 오래도록 해인의 마음속에서 해소될 수 없는 갈증처럼 목마르게 했던 어머니의 사랑, 해인 온 아직도 그 목마름의 갈증 때문에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어머니를 닮은 딸아이가 자신을 향해 쏟아놓는 저 말들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오래도록 쏟아놓고 싶었던 말들인가. '그런데 왜 딸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녀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해인은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딸을 쳐다본다. 유난히 앙큼스럽게 마음을 열지 않던 딸의 마음속에 긴 시간 동안 쌓여 있던 생채기가 해인을 향해 시뻘건 불길을 뿜어대고 있다."(82쪽)


라고 묘사하며 정체성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빨간 지갑>은 세대를 잇는 세 여성의 얽히고설킨 고통과 공허함, 그리고 결국은 치유를 향한 가능성을 담아내는 중요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해인은 암 진단을 받은 후, 무의식적으로 오래전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빨간 지갑을 닮은 가방을 구매한다. 그 지갑 속에는 어머니와 다른 남자아이의 사진이 있었고, 이는 해인에게 혼란과 구토감을 일으켰으며, 결국 돌로 부숴버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인이 새로 산 지갑 역시 복잡하게 열리고 쓸모가 없으며, 딸로부터는 ‘짜가 명품’이자 ‘텅 비어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해인의 내면적 무가치함과 공허함이 이 상징적 오브제 안에 농축되어 있는 셈이다.


딸과의 동체성: 고통의 재현과 깨달음


해인은 딸의 얼굴, 마른 손가락, 그리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어머니의 잔상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유전적 닮음이 아닌, 해인이 오랜 시간 애써 부정해 왔던 고통의 반복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고통의 이미지가 미래로도 확장되는 순간, 해인은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다.


딸은 해인을 향해 “엄마는 정말 필요할 때 내 곁에 없었어요. 텅 빈 느낌이 들었어요”라고 비난한다. 이 말은 해인이 어머니에게 느꼈던 정서적 부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놀라운 반복은 해인에게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오며, 대물림된 감정적 공백이 자신을 통해 딸에게도 흘러들어 갔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클라이맥스에서 해인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뛰어내릴 듯한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딸의 절규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며, 그 품 안에서 해인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바로 이 순간, 해인은 마침내 수십 년간 봉인해 왔던 단어, “엄마”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

어머니와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이 첫 발화는, 감정적 치유를 향한 결정적인 첫걸음이다. 그녀가 딸이 내미는 라이터 불에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은, 어머니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상징적 행위로 읽힌다. 이는 파괴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기억과 관계 맺기를 암시한다.


정신분석학적 함의: 세대 간 전이와 자아의 변형


이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엄마와 딸의 ‘동체성’은 단순한 외모의 유사성이 아니다. 이는 '세대 간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의 심리적 구조이며, 정신분석적 용어로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해인의 어머니가 경험한 정서적 결핍과 고통이 해인에게 그대로 전이되었고, 해인 역시 딸에게 유사한 방식의 정서적 부재를 전달해 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고통의 순환 구조를 정교하게 보여준다.

해인은 '그 여자'로 부르면서 어머니를 부정하며 분리-개별화를 시도하지만, 딸의 존재를 통해 다시금 어머니의 흔적과 마주하고, 그와 자신의 자아가 뒤엉킨 혼란을 겪는다. “내가 그녀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자신이 혐오하던 어머니의 일부가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공포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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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동체성에서의 이탈, 치유의 가능성


<빨간 지갑>은 단순한 가족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머니, 해인, 딸이라는 세 여성의 존재를 통해 세대 간 전이되는 고통과 감정적 부재, 정체성의 혼란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해인이 결국 ‘엄마’라는 단어를 발화하며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직면하는 순간은, 고통의 동체성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한 첫 시도이자, 감정적 회복의 서사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빨간 지갑은 단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를 봉인한 무의식의 상징이며, 동시에 그 봉인을 해제하려는 해인의 심리적 욕망의 투사체다. 지갑을 여는 것,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파괴하거나 다시 지니는 모든 행위는 해인의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있던 감정들을 밖으로 드러내고, 결국 딸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그 반복되는 고통의 구조를 직면하고, 말해지지 못했던 감정이 말로 건너가는 순간, 억압된 세대 간 고통이 해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용히 보여준다. 해인이 딸의 절규 앞에서 돌아서며 발화한 한마디 “엄마”는 바로 그 가능성의 징표이자, 가장 인간적인 치유의 시작이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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