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쯤 가장 큰 변화는 관자놀이를 중심으로 하나 둘 눈에 띄는 흰머리였다.
더 이상 뽑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났을 때의 상실감이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격이 변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냅다 낯선 사람한테 말을 걸지는 못했다.
나름 낯을 가려서 상대방의 반응이 긍정적일 때 혹은 상대방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어 주면 그때서야 술술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유독 수월해졌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 여름이었는데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한참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아주머니는 짐을 한아름 가지고 있었는데 짐 사이로 노란 꽃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화분을 많이 키우시는 분일테다.
‘날씨가 너무 덥죠.’ (아니 지금 내가 뭐라고 한거야?) 내가 내 입을 제어하기도 전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휴, 더워 죽겠어요. 뭔 날씨가 이렇게 더운지. 버스 한참 기다렸는데 왜 안와요?’
‘어머, 그러게요. 이 동네 가는 버스는 배차시간이 긴 것 같아요.’ 오늘 꽃을 샀다는 둥, 날이 더워 입맛이 없다는 둥, 저녁은 뭘 해먹어야 하냐는 둥 한참을 버스를 기다리며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적에 엄마한테 아무나하고 얘기한다고 타박했는데 내가 딱 그 꼴이네.’
나이가 들면 넉살이 느는 걸까?
일단 날씨 이야기로 물꼬를 튼 다음, 짐이 많으면 무겁겠다며 걱정스런 투로 말한다.
혹은 눈이 자꾸만 마주친다 싶으면 가볍게 인사를 먼저 건넨다. 그러면 열에 아홉 명은 자식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다 수다쟁이 아주머니라도 만나면 인생사 절반은 들을 수 있다.
택시 기사님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하고 밝게 인사를 건네고 행선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대부분 기사님이 먼저 질문을 하시는데 나는 또 질문에 충실히 대답한다.
대부분의 기사님들 역시 자신의 삶의 가치부터, 진상 손님이야기, 한때 병마를 극복했던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 굉장히 폭넓은 대화를 이끄신다.
때로는 조용히 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루 종일 운전하며 대화할 일이 없으셨을 텐데 싶어 기꺼이 대화한다.
어릴 때는 아무나하고 대화하는 엄마가 부끄러웠다.
아줌마들은 다들 그렇게 수다쟁인 건지, 아님 남 일에 참견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괜히 엄마를 타박하기도 했다. (세상 불효녀가 여기 있었네.)
그러던 내가 엄마처럼 낯선 사람이랑 대화를 한다니, 심지어 이제는 막 말을 걸고 싶다니까?
얼마 전 외부 나들이 행사로 사전답사를 다녀왔는데 관광지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중년 여성들을 보며 “위에가 더 예뻐요.” 라며 참견 아닌 참견을 해버렸다.
괜히 머쓱해서 동행한 동료에게 ‘저 나이 들었나봐요. 막 아무한테 말을 걸어요.’ 라고 괜스레 해명아닌 해명을 했다.
오지랖일 수도 있고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엄마 같고 이모 같아서 편하게 말이 나오는 것 같다.
더운 날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 혹시라도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힘들지는 않을지 하는 마음도 생기고, 엄마나이의 어른들이 관광지에서 호호호 웃으며 사진 찍는 모습 보면 ‘우리 엄마도 저렇게 놀러 많이 다니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예쁘다, 사진 찍어드리겠다며 응원해준다.
내가 나이가 드니 어릴 적 봐왔던 부모님이 이해가 된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엔 더없이 공감하던 모습들.
갈 길을 재촉하며 ‘모르는 사람인데 그냥 가자.’며 손을 잡아끌던 내가 40대가 되니 부모님처럼 낯선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을 응원해주고 싶고 점점 대화할 사람이 없는 분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건네고 싶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하겠지만, 이제야 부모님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어른들을 응원해주고 싶은 걸 표현하는 방법인 것 같다.
성격도 유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전에는 예민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예민하다는 말이 은근히 폭력적이라 사연이 많은데, 일단락하고) 몇 년 전부터 성격이 무던하다던가, 유하다는 말을 듣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부모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커지면서 부모님 나이뻘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젊은이들은 또 젊은이대로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으로부터 오는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는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치가 높아진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로부터 나를 살아내게 하는 것들을 찾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며 이해하겠다.
낯선 사람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한다고 배우는 이 사회에서 나는 좀 더 듣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