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또라이
1. 나는 또라이
오래된 친구들은 나더러 ‘미친놈’라고 칭하거나,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저 병신’이라고 부르더랬다. 국어사전 적으로는,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또는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주로 남을 욕할 때에 쓴다] 라고 일컫어지는 낱말들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비속어로 나를 불러주는 게 무언가 좋더란다.
마치, 괴짜로 불리던 아인슈타인이 실질적으로는 천재인 것 마냥, 막말의 달인으로 불리우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실은 몇천 년이나 지난 이후에도 비범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인 것 마냥.
나는 ‘또라이’, ‘병신’ 같은 단어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칭찬 같은 단어로 들리더랬다.
적색 약, 녹색 약을 가진 당신들은 적색과 황색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나 같은 ‘또라이병신’ 들은 색을 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말이다. 다양한 시각으로 색을 볼 수 있는 선구자적 눈을 가진 사람들은 색약에 비해 얼마나 비범하며 시야가 넓던지 말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그런 비속어로 일컫어줄 때면, 나는 정색하며
“너 말이 심한 것 아니니?”
가 아닌,
“응. 고마워 나 또라이야~”
하며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바보마냥 헤실헤실 웃던 나였다.
나는 나를 그리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친구들이 좋더라.
‘저 새끼 저거 진짜 싸이코 아니야?’
라며 나를 저능아 취급하는, 친분이 없는 사람들의 모욕적인 단어를 들어도,
나는 뒤에서 음-흉 하게 인정받았다며 미소를 짓던 싸이코였다.
국어사전적 정의가 다소 험악하게 표현되었을 뿐이지, 당신들도 아마 그런 경험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편견이 아닌 나를 그대로 바라봐주고 인정해 주는 그 비속어들이 한 번씩은 반가울 때가.
마치 오래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여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악의와 거짓이 내포되지 않은 그 욕설이 되려 반가운 상황들 말이다.
욕쟁이 할머니 집의 국수를, 금액을 지불하고서까지 굳이 욕을 듣고 싶어 하는 당신들이나,
십년지기 친구의 ‘니까짓 게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살포시 무시하며 웃는 음성에 되려 위안을 얻고 피식 웃는 당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천재’, ‘아름다움’, ‘세련됨’, ‘고상함’과 같은 칭송 하며 일컫어지는 미래 지향적인 단어들이 아닌, ‘또라이’, ‘병신’, ‘저능아’, ‘사이코’ 같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과거, 현재형 단어가 좋더라.
몇 년 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세미나 모임에서, 닭살 돋는 아부와 칭찬들을 들으며 연신 ‘감사합니다’ 하며 고상한 척을 떨고 있던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옥외에서 담배 하나 피면서 친구에게 전화해 쌍욕 한마디라도 들어야지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시간이 내겐 필요했다.
조금 더 simple하게 살고 싶었다. 야외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친구와 전화하는
‘김 작가’는 치렁치렁 보석과 디자이너 브랜드를 풀장착한 채, 모순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