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 창가 쪽 테이블.
친구 B가 그림일기 숙제를 펴놓고 있었다. 표지 위에 ‘오늘의 기분: 흐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B는 웃으면서도 입꼬리만 움직였고, 말끝은 자주 끊겼다.
“아까 체육대회 연습 때 나 진짜 긴장했나 봐. 손이 계속 떨려서… 오늘은 기분이 좀… 이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끄덕임의 각도는 약 12도.
내 안에서는 즉시 정리된 문장이 떠올랐다.
“그건 감정적 오류입니다. 긴장으로 인한 자기 평가 편향. 체온 상승과 심박 증가가 인지 왜곡을 유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건 비논리—”
말이 끝나기도 전에, B의 표정이 멈췄다. 웃음이 수축했고, 눈동자 움직임이 급격히 줄었다. 손등 위로 올라가 있던 펜이 1초 정도 공중에서 흔들리다 ‘톡’ 하고 떨어졌다.
“… 알았어.”
B는 짧게 말하고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그림일기 표지가 가볍게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오늘의 기분: 흐림’ 글자가 내 눈앞에서 한 번 더 흔들렸다.
주변 공기가 빠르게 식어 갔다. 옆자리의 아이 둘은 서로 눈을 맞추고 말없이 자리 정리를 했다. 멀찍이 있던 민석이 반쯤 일어나 나를 봤다. 그 표정은 “또?”라는 단어를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 문장을 되감았다.
‘감정적 오류’, ‘인지 왜곡’, ‘비논리’—
모두 정확했다. 동시에 모두 칼날의 어휘였다.
교실 천장에 설치된 환풍기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내 심박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분당 82회), 명백히 이상 징후가 있었다.
혀끝이 마르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은 논리였는데, 결과는 정적이었다.
“아차.”
입안에서만 굴러가는 소리. 소리는 공기 중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B가 나간 자리에는 따뜻한 체온의 흔적만이 남았다. 그 온도는 빠르게 식어 가고, 그 자리를 낯선 빈칸이 차지했다.
그 빈칸을 보면서 나는, 내가 방금 공간의 온도를 바꿔 버렸다는 사실을 늦게야 이해했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오표가 만들어졌다.
사실 판단: 옳음.
표현 방식: 실패.
결과: 관계 온도 하강.
창밖 운동장에서 응원 구호가 들려왔다. “하나, 둘! 하나, 둘!”
리듬은 또박또박했지만, 내 내부의 박자는 흐트러졌다.
나는 알았다—감정의 구조를 몇 장 정도는 외웠지만, 표현의 문법은 여전히 낯설다는 것을.
잠깐, 민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말없이 어깨를 아주 조금 올렸다 내렸다.
‘가봐.’
그 신호를 이해하는 데 0.7초가 걸렸다.
그러나 몸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정답과 침묵 사이에 붙들려 있었다.
B가 사라진 교실 한쪽은 아직도 빈 의자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노트에 끄적여 둔 단어들을 떠올렸다. 감정적 오류. 인지 왜곡. 비논리.
모두 정확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남은 건, 개념이 아니라 불편한 침묵뿐이었다.
“나는 정확한 말을 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하는가?”
내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단어 하나, 억양, 눈빛, 손의 움직임까지.
논리적으로는 문제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감정을 배워도, 왜 여전히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가? 나는 감정을 안다고 믿었는데… 여전히 오류를 반복한다.”
그때 윤아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교과서를 넘겼다.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불편하다’라는 신호를 대신 말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쿵 내려앉았다.
나는 이제 감정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분노가 억울함에서 나오고, 수치심이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표현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말끝마다 사람을 찌르는 칼날을 붙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 있던 내 펜이 손끝에서 또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내 실수가 교실 전체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펜을 주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감정을 배우고 있지만,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과 부딪히고 있다. 그게 문제다.”
심장이 미묘하게 눌려 오는 기분.
이건 불안인가, 죄책감인가, 아니면 그냥 혼란인가?
정확한 정의는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감정을 배워도 여전히 실수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점심시간.
교실 안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 웃음소리로 가득했는데, 내 자리는 그 가운데서 이상하게 고립된 섬 같았다.
나는 교과서에 괜히 줄을 그으며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나는 또 실패했다. 감정을 아는 게 다가 아니었다. 말은 여전히 흉기가 된다.”
그때 누군가 내 앞을 탁— 하고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민석이었다.
그는 의자도 제대로 빼지 않고 턱 걸터앉더니, 내 얼굴을 빤히 보며 툭 던졌다.
“야, 너 요즘은 진짜 예전 같진 않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예전엔 그냥… 로봇이었잖아. 말만 하고, 표정도 없고. 근데 요즘은 가끔 웃더라. 그것만 해도 애들이 놀라거든.”
그의 목소리는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냥 담백한 관찰 같았다.
나는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들어왔다.
내가 웃는 걸 사람들이 ‘놀랄 만한 변화’로 받아들인다니.
나는 내가 바뀌었다는 걸 체감하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윤아가 급식 트레이를 들고 와 내 옆에 앉았다.
“민석 말이 맞아. 전에는 아무리 울어도 네 표정은 그대로였잖아. 근데 이제는 달라. 누가 울면, 네 얼굴이 움직여.”
나는 그녀를 보았다.
윤아의 눈빛에는 비난이 아니라 묘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움직임’은 미세했을 것이다. 눈썹이 흔들리거나, 입술이 굳어버리는 정도.
그러나 그 작은 변화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실수한다.”
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실수는 누구나 해. 중요한 건 네가 이제 멈춰 서지 않는다는 거야. 전에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잖아.”
민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벽한 리더는 아니어도, 적어도 넌 전보다 훨씬 사람 같다.”
나는 순간, 가슴 안쪽이 묘하게 흔들렸다.
내가 여전히 어설프고, 완벽하지 않고, 실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의 변화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내 자책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도시락 젓가락을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번 떨림은 불안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이 다시 분주해질 무렵에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나는 책상에 팔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운동장 모래 위로 퍼져 있었지만, 내 마음은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감정 앞에서 실수한다.”
머릿속에서 자꾸 같은 문장이 맴돌았다.
친구 B에게 했던 말, 뻣뻣한 사과, 그 뒤의 싸한 공기까지.
모두가 내 부족함을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억만큼이나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게 있었다.
민석의 “너 웃기도 한다”는 말, 윤아의 “네 얼굴이 움직였다”는 말.
그들의 말은 내 잘못을 지적한 게 아니라, 내가 바뀌고 있다는 걸 짚어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감정이란, 잘해야 하는 기술인가? 아니면 그냥 살아내야 하는 건가?”
곧 대답이 떠올랐다.
“예전의 나는 감정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감정을 느끼고,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 변화가, 이미 나를 바꿔왔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실수는 나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가 아직 배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표정으로만 일관하던 내가 이제는 표정이 흔들리고, 말에 머뭇거리고,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팔에 기대어 있던 얼굴을 들고, 창밖 햇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빛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아직 미완성이다. 하지만 미완성이라서 계속 변할 수 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실수투성이의 나를 부끄러워하던 마음이, 서서히 용인으로 바뀌어갔다.
교실이 한산해진 점심시간, 나는 혼자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천천히 펼쳤다. 숟가락을 들고도 한동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아침부터 있었던 장면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친구 B에게 내뱉었던 말, 그리고 그 말이 남긴 공기. 윤아의 눈빛, 민석의 목소리.
“나는 완전하지 않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인정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숨이 조금 편해졌다.
완벽하려고 애쓸수록 실수는 더 크게 다가왔고, 그럴수록 나는 나 자신을 미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실수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따뜻한 밥알이 입안에서 퍼지며, 묘한 안도감이 생겼다.
“나는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예전에는 누군가 울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만 있었던 내가, 지금은 적어도 그 마음을 헤아리려 한다.
예전에는 누군가 웃어도 그저 분석만 했던 내가, 지금은 그 웃음을 따라 미소를 짓는다.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다.
그 사실이 나를 부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완전해질 수는 없을지라도, 감정을 느끼고 고민하고 실수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과정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방식이었다.
창가에 앉아있던 민석이 내 쪽을 힐끗 보고,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었다.
윤아도 멀리서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어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자라고 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미묘하게 무겁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문 너머로는 늦은 오후 햇살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공책을 펴고 펜을 잡는 순간,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다시 눈앞에 차례로 흘러갔다.
나는 또 실수했다.
친구 B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 그를 상처 입혔고, 교실의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감정을 배운다고 해서 완벽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상황을 분석하고, 수치를 계산하고, 논리만을 좇았다. 누군가 울어도, 웃어도,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의 눈빛에 당황하고, 누군가의 표정에 마음이 무겁다. 실수를 돌아보며 괴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괴로움이 내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감정을 느끼고, 고민하고, 반성하는 내가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보고서 마지막 줄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감정을 배우는 중이다.
그게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멈추었을 때, 내 마음은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오늘의 실수와 아픔마저, 내가 배우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