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공기는 오후 햇살에 눅눅하게 눌려 있었다.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바람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이천재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두툼하게 묶인 공책 뭉치를 발견했다. 허술한 고무줄로 겨우 고정된 낡은 노트들. 그는 그것을 꺼내 탁자 위에 탁 놓았다.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그 노트들은 모두 ‘감정 관찰 보고서’였다. 한 장 한 장, 그의 지난 시간을 기록한 흔적. 천재는 손끝으로 종이 위에 스친 연필 자국을 더듬었다. 글씨는 일정하지 않았고, 때로는 삐뚤고 조잡했다. 하지만 그 속엔 자신이 감정을 배우고자 몸부림쳤던 흔적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맨 위에서 발견한 건 **‘1호 보고서’**였다. 제목은 단순했다.
울음은 수분 손실이다.
천재는 그 글귀를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땐 눈물이 감정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이라고 생각했지.” 그의 목소리엔 스스로를 비웃는 가벼운 기색이 섞였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앉아, 친구들이 울거나 웃을 때조차 아무런 감정 없이 ‘데이터’처럼 기록하려 했던 모습. “그때는 사람의 감정을 관찰 대상이라고만 여겼구나.” 그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들은 작은 탑처럼 세워져 있었다. 얇은 종이들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울음, 웃음, 화, 수치, 고백, 책임, 진심… 그 모든 순간의 흔적이 차곡차곡 켜켜이 얹혀 있었다.
천재는 고무줄을 풀고 노트를 펼쳐놓았다. 종이에서 오래된 연필 냄새가 났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건 단순히 과거 기록을 읽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지나온 감정의 역사, 즉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좋아, 이제 차례대로 읽어보자.” 그는 책상 앞에 곧게 앉았다.
마치 시험지를 다시 풀 듯, 그러나 이번에는 정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길을 확인하기 위해서.
천재는 노트 뭉치에서 몇 장을 골라 펼쳤다. 글씨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차츰 번져 있었다. 그는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짧게 기록된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기쁨》
“나는 왜 기쁘면 뛰는가? 과잉 에너지일까?”
그 밑에는 삐뚤빼뚤한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고, 옆에 덧붙인 메모가 보였다.
“아니다, 그건 연결이다. 함께 있다는 감각이 몸을 튀어 오르게 한다.”
천재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드디어 ‘함께 있음’이 기쁨이라는 걸 처음 알았지. 그냥 웃는 현상이 아니었어.”
《분노》
“내가 화를 냈을 때, 나는 나를 처음으로 뚫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가 윤아를 향해 서툴게 목소리를 높였던 날이 떠올랐다.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동시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던 그때.
“분노는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막힌 걸 뚫는 거였구나.”
《슬픔》
“누군가 울고 있을 때, 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건 공명이었다.”
짧은 기록이었지만, 천재는 그날의 장면을 선명히 떠올렸다. 윤아의 눈물이 멈추지 않던 날,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젖었던 순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울음이 수분 손실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지.”
《수치심》
“나도 ‘쪽팔림’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그 감정은 나를 낮췄고, 겸손하게 했다.”
천재는 기록을 읽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칠판 앞에서 더듬으며 애들 웃음을 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이 가진 ‘약점’을 배웠던 거야. 수치심은 낮추는 게 아니라,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었어.”
《고백》
“감정을 말하려 할 때, 목이 잠겼다. 감정은 말보다 먼저 온다.”
천재는 이 문장을 보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밑줄을 그었다.
“맞아, 윤아 앞에서 처음으로 내 마음을 말하려 했던 날. 입술은 떨렸고, 목은 말라붙었지. 그런데 그 침묵조차 감정이었다는 걸… 지금은 알 수 있어.”
《책임》
“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 감정은 내 말에 남는 흔적이었다.”
천재는 가슴이 다시 무거워졌다. 반장으로서 회의에서 했던 직설적인 지적들. 사실은 옳았지만, 친구들의 얼굴을 무겁게 만들었던 순간.
“책임은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감정의 무게였구나.”
《진심》
“진심은 정확한 말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였다.”
천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민석이 친구를 위로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닿고, 침묵이 따뜻했던 순간.
“그때 나는 배웠어. 진심은 기술이 아니라 용기라는 걸.”
그는 보고서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작은 숨을 고르듯 중얼거렸다.
“나는 감정을 분석하려고 썼는데… 지금 읽으니까, 감정이 나를 설명하고 있네.”
책상 위 종이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와 흔적을 되짚는 지도였다.
천재는 보고서를 덮고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종이에 적힌 문장들이 그의 내면을 건드리며 질문과 답을 끌어냈다.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처음에 나는 감정을 이해해야 할 데이터라고 생각했다. 울음은 수분 손실, 기쁨은 과잉 에너지, 분노는 통제 불가. 분석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잠시 멈춘 그는 보고서 위에 펜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감정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다. 감정은 내가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그럼 너는 이제 감정을 다 이해했나?”
“… 아니. 나는 아직도 실수한다. 잘못 말해서 친구를 상처 주고, 혼자 자책하고, 때로는 멈칫거리기도 한다.”
“그럼 그게 무슨 성장이지?”
“성장은 완벽해지는 게 아니야. 내가 느끼지 못하던 걸 이제는 느끼고 있다는 사실, 그게 성장이다.”
천재는 스스로의 답변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감정을 배운 것이었다.”
그 문장은 생각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 나왔다.
과거의 그는 ‘논리적 기계’였고, 현재의 그는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자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책상 위에 펼쳐둔 노트를 한 장, 또 한 장 넘기다 보니
내가 과거에 적어둔 문장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감정 = 오류.’
‘감정 = 비논리적 반응.’
‘감정 = 판단을 흐리게 하는 노이즈.’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때 나는 감정을 마치 계산에서 발생하는 오차처럼 여겼지.
있어서는 안 될 것, 최대한 줄여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
눈길이 지금의 노트로 옮겨갔다. 최근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정 =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
‘감정 =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
‘감정 = 선택의 근거.’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감정을 피하고 무시하는 대신, 오히려 그 안에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웃을 때, 그 웃음이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고.
누군가 울 때, 그 눈물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
분명 나는 흔들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흔들림 속에서 방향을 찾고 있었다.”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여전히 감정을 오류로만 취급했다면…
나는 옳았겠지. 하지만 철저히 혼자였을 거야.
옳지만 외로운 존재.”
손끝이 떨렸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감정은 내게 틀림없는 오차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언어였다.
내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안아야 하는 것.”
나는 여전히 서툴렀다.
누군가에게 건넨 말은 자주 날카로웠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로 남기도 했다. 어떤 날은 억지로 감정을 분석하려 애쓰다 오히려 눈앞의 마음을 놓쳐버렸다. 또 다른 날은 감정의 무게에 휘둘려, 내가 세워둔 논리의 틀을 산산조각 내버리기도 했다.
예전의 나는 그런 순간들을 ‘실패’라 정의했다.
“나는 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감정을 배워도 결국 부족한가?”
그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했고, 감정을 다룬다는 것의 끝이 도달 불가능한 목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본다.
실수와 흔들림, 실패와 약함은 인간의 본질이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은 존재였다. 완전해지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외로워지고, 더 단단한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때 ‘감정 없는 효율’을 인간의 완성이라 여겼다. 옳은 판단, 정확한 계산, 오류 없는 선택.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모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나는 텅 빈 자신을 마주했었다. 옳았지만 외로웠던 나, 정확했지만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했던 나.
이제는 안다.
인간다움은 완벽한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서로를 느끼는 순간에 깃든다는 것을. 내가 흔들릴 때, 친구들의 위로가 내게 닿았다. 내가 약해질 때, 윤아의 눈물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 모든 경험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나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내가 인간임을 증명한다. 감정 앞에서 약해지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다움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씨앗을 부끄럽지 않게 품으려 한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 한 권.
나는 펜을 들고, 오늘의 기록을 시작했다.
감정 관찰 보고서 29호
“오늘, 나는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았다.
이 노트에 남긴 글자들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나온 감정의 흔적이었다.
나는 감정을 처음엔 ‘분석해야 할 현상’이라 생각했다. 울음은 수분 손실이고, 분노는 통제 실패이며, 기쁨은 과잉 에너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감정은 그런 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은 현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잠시 펜을 멈추고 창문을 바라봤다. 바람이 흔들어주는 커튼의 자잘한 그림자마저, 오늘따라 무언가 살아있는 듯 느껴졌다.
보고서를 다시 이어 적었다.
“감정은 정답이 아니다.
감정은 내가 세상을 만나고, 타인을 느끼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옳으려 했으나, 감정이 없을 때 나는 외로웠다.
나는 효율을 따르려 했으나, 감정이 없을 때 나는 공허했다.
감정을 품었을 때, 나는 완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더 인간다워졌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감정 앞에서 여전히 서툴고, 실수하며, 때로는 무너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두려움으로만 보지 않는다.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마지막 문장을 또박또박 적었다.
“나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인간다워지고 있다.”
펜 끝이 종이를 떠날 때, 내 안에 오래 쌓였던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보고서는 끝났지만, 나의 감정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끝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여정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나는, 나의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