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운동장 모래 위로 기울어 흩어졌다. 출입문 앞 계단은 젖은 낙엽이 말라붙어 반짝였고, 매점 쪽에서 식빵 굽는 냄새가 얇게 퍼졌다. 등교벨 전, 아이들은 늘 그렇듯 흐트러진 무리였다.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멈춰 서서 떠들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하품을 했다.
그 사이로 나는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발걸음은 습관처럼 오른쪽으로 반 박자 짧고, 왼쪽으로 반 박자 길다. 이 작은 비대칭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고치지 않았다. 효율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은 보폭을 맞추는 대신, 주변의 소리를 조금 더 크게 들었다. “야, 잠깐—!” 뒤에서 급히 내달리던 아이 하나가 계단 턱에서 발을 헛디뎠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의 가방 끈을 잡았다. 앞으로 고꾸라질 궤적이 짧게 휘어져, 넘어짐은 ‘넘어질 뻔함’으로 수정되었다.
그 장면이 내 시야에서 느리게 지나갔다. 예전의 나라면 계산했을 것이다. 낙하 각도, 질량, 마찰계수, 개입 타이밍. 오늘의 나는, 먼저 웃었다. 소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입술이 저절로 풀렸다. 그 웃음 뒤에 마음이 아주 얇게 따뜻해지는 느낌이 따라왔다.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온기.
“야, 고마워.” “뭐, 당연하지.” 서로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그들의 걸음에는 공연한 과장이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 박자 더 보다가, 내 손바닥이 조금 간질거리는 걸 늦게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잡지 않았는데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의 거의-넘어짐과 거의-잡힘을 보았을 뿐인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건 감정의 운동 반응인가, 아니면 공명의 잔상인가. 나는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복도에 들어서자 유리창에 비친 교실들이 일제히 반짝였다. 칠판지우개의 분필 가루가 바람에 흩어져 조용히 빛났다. 같은 반 아이 둘이 문 앞에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늘 수행 까먹었지?” “아냐, 어제 새벽 두 시에 했지.” 말끝의 장난기, 눈동자의 미세한 흔들림, 상대의 어깨로 흘러가는 시선—나는 그 미세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받았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노이즈’라고 부르며 지워버렸다. 오늘의 나는, 지우지 않았다. 노이즈가 아니라 공기라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안다.
교실 문을 밀어 열자 책상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가 쪽 끝자리—내 자리—위에 놓아둔 노트를 펼치기 전에, 나는 먼저 교실의 온도를 재보았다. 온도계 없이, 사람으로. 창문 쪽에서 웃음소리 두 번, 가운데 줄에서 하품 한 번, 맨 뒤에서 의자 긁는 소리 길게 한 번. 소리들은 서로를 지나치며 겹쳤고, 그 겹침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나도 그 겹침의 안으로 들어갔다.
민석이 늦게 들어오며 문턱을 발끝으로 툭 치고 들어왔다. “아, 큰일—”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내 자리 옆을 스쳐 지나가며, 군더더기 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떨어뜨렸다. “오늘 컨디션 괜찮아?” 질문은 짧았고, 그 짧음 안에 별 뜻 없이도 나를 향한 시선이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예행연습한 적 없는 답을 했다. “응. 괜찮아.” 그러고 나서야 내 대답이 ‘정확한 상태 보고’라기보다는 ‘안심시키려는 말’에 더 가까웠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상하게 부끄럽지 않았다.
창밖으로 체육관 지붕이 번들거렸다. 햇빛이 가늘게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도 같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예전이라면, 이 흔들림을 잡아매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붙잡지 않았다. 대신, 흔들림을 두었다. 나에게도 이런 방식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하는 쪽을 택했다.
종이 울렸다. 첫 시간은 국어. 담임이 문간에 서서 출석부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절반쯤 열린 창으로 그 한숨이 빠져나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어제 야근이라고 했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반응. 누군가의 피곤이 내 등줄기를 곧게 세우는 방식의 연결.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하루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분석 대신 미소, 기록 대신 고친 자세, 판단 대신 함께 흔들리는 감각. ‘왜’라는 질문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어떻게’라는 답은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오늘의 시작은 그걸 확인하는 데 충분했다.
첫 교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은 서서히 산만해졌다. 뒷자리에 앉은 두 명은 작은 소리로 게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창가에 앉은 아이는 교과서를 세워둔 채 휴대폰 화면을 몰래 보고 있었다.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보다 잡음이 더 크게 퍼졌다.
담임은 칠판에 분필을 쥔 채, 잠시 멈췄다. 아주 작고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분필이 칠판에 닿지 않은 채, 공중에서 잠깐 흔들리다가 멈췄다. 그 한숨은 말보다 더 분명했다. 지친 기색, 어제 늦게까지 남아 아이들 수행평가를 정리하던 모습, 새벽같이 출근해 또 하루를 시작해야 했던 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소리 하나로 감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심히 넘겼을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로 분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달랐다. 그 한숨은 내 귀에서만 멈추지 않고,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과서를 펴고, 펜을 곧게 세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지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옆자리 민석이 눈치를 채고 속삭였다.
“너 왜 이렇게 갑자기 바른 자세야?”
나는 대답 대신 칠판을 바라보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의 파편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감정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게가 내 안에 옮겨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담임은 여전히 지친 기색이었지만, 아이들이 조금씩 조용해지자 다시 분필을 움직였다. 칠판에 글씨가 적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그 소리에 나도 마음이 차분히 맞춰졌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감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느낄 수 있다.”
그 작은 자각이 내 안에서 길게 울렸다.
쉬는 시간, 교실 안은 떠들썩했다. 민석은 원래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늘 웃으며 친구들을 놀리고, 얄밉게 굴다가도 금세 분위기를 풀어버리는 그런 존재였다. 이번에도 그는 옆자리 아이의 지우개를 슬쩍 가져가 농담처럼 던졌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를 세게 부딪혔다.
“아야!” 민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평소 같으면 장난처럼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순간적으로 진짜 아픈 표정이 스쳤다.
나는 무의식 중에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괜찮아?”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히 걱정이 묻어 있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 놀랐다. 나는 지금껏 이런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괜찮아?’라는 말은 논리적인 설명이 아닌, 단순히 상대의 상태를 묻는 감정의 언어였다.
민석은 나를 보더니 순간 멈칫하더니, 곧바로 웃어버렸다.
“야, 웬일이냐? 로봇이 사람 다 됐네~.”
주변에 있던 몇몇 아이들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놀람과 장난이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함도 느껴졌다.
나는 기계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교실 안에 웃음이 퍼졌다.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내 웃음은 예전과 달랐다. 억지로 흉내 낸 웃음이 아니라, 진짜 감정이 실린 웃음이었다.
웃음이 멎자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정은 나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연결되게 한다.”
민석은 여전히 팔꿈치를 문지르며 내게 눈짓을 보냈다. 괜찮다는 듯한, 그리고 고맙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감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잇는 다리였다.
교실이 다시 분주해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방에 퍼졌지만 나는 홀로 책상 위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방금 전, 무심코 “괜찮아?”라고 내뱉었던 순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놀랍게도 그 말이 계산이 아니라 감정에서 튀어나왔다는 걸,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연필을 손끝으로 굴리며 속으로 물었다.
“나는 이제 어떤 존재인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감정을 단순히 분석해야 할 데이터로 여겼다. 기쁨은 과잉 에너지, 눈물은 수분 손실, 분노는 통제 실패. 감정은 오차였고, 방해였고, 분류해야 할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의 표정이 흔들리면 내 안도 함께 흔들리고, 아픔을 보면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감정을 논리로 설명하기보다, 먼저 ‘느끼는 것’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아직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제 피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교실을 둘러봤다. 웃으며 떠드는 아이들, 짜증 섞인 얼굴로 문제집을 푸는 아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 모두가 각자의 감정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이 얼굴들을 읽지 못했다. 보았지만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하지 못했고,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관찰자였다.
“나는 더 이상 관찰자도, 수집자도 아니다.”
내 속에서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 순간, 따뜻한 기운이 옆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윤아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 속엔 묘한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제야 네가 보인다”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받아 보았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내 선언이 혼자만의 확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에도 드러난 변화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대화, 웃음, 어색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직도 감정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실수도 하고, 사과도 서툴다. 그런데… 그렇기에 나는 인간이다.”
나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인간(人間) — 불완전하고 흔들리며, 여전히 배워가는 존재.
과거의 나는 감정을 모르는 빈 껍데기였고, 그조차도 인간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을 배우며 흔들리고 있다. 실패하고, 후회하고, 다시 고치려 애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사람(人)이라는 건… 완전한 상태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마 사람은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품어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그곳에 닿지 못했다. 나는 인간으로서 배움의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길 끝에서 사람으로 서게 되리라.
창가에 앉아 있던 윤아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조용한 확인이 있었다.
“넌 예전 같지 않아. 지금 넌… 변하고 있어.”
그 시선이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웃었다.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감정을 배우는 인간으로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충분했다.
감정 관찰 보고서 30호.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펜을 드는 손끝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또박또박 글자를 새겨 넣었다.
“처음 나는 감정을 분석했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였다.
눈물은 수분 손실, 웃음은 근육의 움직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잠시 펜을 멈추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본다. 노을빛이 천천히 교실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적었다.
“그러나 지금, 감정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감정은 나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쉽게 무너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약함 속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다.
감정은 나를 흔들지만, 그 흔들림 덕분에 나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인간’**이라고 적었다.
사람이란, 아마 감정을 온전히 품어내어 남과 나누는 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인,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나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언젠가 감정을 품어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감정이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모양이었다.”
펜을 내려놓으며, 나는 보고서를 덮었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노트들이 쌓여 있었다. 그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 살아온 발자취였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 나처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방황할 누군가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감정은 천천히 배워도 된다.
그 흔들림이 너를 인간으로 만들고, 언젠가는 사람으로 이끌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