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감정이 나를 약하게 만든다 해도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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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예상치 못한 감정의 요동


“가족이 나에게 준 영향.”

칠판에 적힌 그 문구는 그저 하나의 수업 주제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어떤 아이는 아빠와 매주 나가던 축구 얘기를 꺼냈고, 또 다른 아이는 언니가 시험 기간에 밤새 같이 공부해 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교실은 소소한 웃음과 웅성거림으로 따뜻하게 물들어갔다.

그때, 맨 앞줄에 선 한 친구가 말했다.
“저는 할머니가 늘 아침밥을 챙겨주셨어요. 제가 학교 늦지 않게 깨워주시고, 김도 구워주셨어요.”

그 말에 교실 전체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지만, 천재는 웃지 못했다.
가슴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 끝이 움찔했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릿속에, 오래도록 꺼내지 않았던 장면이 불쑥 재생됐다.
흰색 커튼으로 둘러싸인 병실.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할머니의 말 없는 눈빛.

그때의 자신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줄 알았다.
그저 침대 옆에 앉아 무표정하게 바라봤을 뿐.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던 할머니, 대신 미안하다는 듯 희미하게 손등을 잡아주던 순간.
그날 병실의 공기와 온도가, 이제 와서 교실 안에서 그대로 되살아난 듯 가슴을 조여 왔다.

천재는 당황스러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목이 뻣뻣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은 분명히 ‘지금은 수업 중이다’라고 외쳤지만, 감각은 제멋대로 과거의 장면을 불러왔다.

논리는 준비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은 이미 그의 안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눈시울의 뜨거움과, 손끝의 미세한 떨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천재는 혼자서 완전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2절 감정 억제: 흔들리는 건 약한 것


종이 넘기는 소리, 분필 긋는 소리, 옆자리 친구들의 숨죽인 웃음.
모든 게 평소와 똑같은 교실 풍경인데, 천재의 세계만 달라져 있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려, 마치 속도가 제멋대로 올라간 시계처럼 불규칙하게 뛰었다.
심장이 이토록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걸, 그는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병실의 흰 커튼에 갇혀 있었고, 할머니의 눈빛이 계속해서 자신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천재는 책상 밑으로 손을 감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두려웠다.
‘나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 나는 강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강박처럼 명령을 걸었다.

그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감정은 비효율이다.”
“논리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철칙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규칙은 무력했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고,
교과서에 시선을 고정하려 해도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이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건 감정의 반란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침대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 미안한 눈빛.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지금 와서 이런가?
지금의 흔들림이, 그날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부채처럼 몰려온 것일까?

천재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겉으로는 무표정한 중학생의 얼굴,
그러나 속은 무너지는 성벽처럼 휘청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건 약한 것이다.’
그가 늘 믿어온 논리였다.
그럼 지금의 자신은 약해진 건가?
그 질문이 마음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며, 더욱 답답한 벽을 세워 갔다.



3절 운동장: 고립된 감정의 공간


종이 치자마자 천재는 누구보다 먼저 교실을 나왔다.
책상에 두고 온 필통도, 칠판에 남은 선생님의 필기도 뒤로 한 채.
그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은 모두 급식실이나 교실에 모여 있었고, 넓게 펼쳐진 흙바닥 위에는 바람만이 분주히 흔적을 남겼다.
낡은 축구 골대 그물망이 덜컥 덜컥 흔들렸고, 먼지가 바람에 휘말려 공기 속으로 흩날렸다.

천재는 천천히 걸었다.
운동장의 흙이 신발 밑에서 바스락거릴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도 뭔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얼굴에 스친 바람은 시원했지만, 이상하게 눈가가 따가웠다.
눈물이 나오려는 건가?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볕은 평소처럼 따사롭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 혼자 낯선 계절을 맞이한 것 같았다.

“감정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를 무너뜨린다.”
천재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논리적 판단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자신이,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수학 문제를 풀 때처럼 정확하게 감정을 정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의 감정은 공식도, 정의도,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기 위로 희미하게 흘러왔지만,
그 소리마저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일처럼 들렸다.

혼자라는 감각이 뼛속까지 밀려왔다.
그 고립이 오히려 감정을 더 크게 키웠다.
‘이게 사람이라는 건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게 인간의 방식인가?’

천재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숨은 쉽게 내뱉어지지 않았다. 마치 가슴속에 거대한 돌이 걸린 듯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흙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그 어떤 감각도 지금의 혼란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운동장은 넓고 텅 비어 있었지만, 그 공간 안에서 그는 오히려 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감정이라는 그림자가 자신을 조용히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4절 민석과의 대화: 약함의 재정의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던 천재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바람은 불었지만, 가슴 안의 답답함은 여전히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야, 이천재.”

천재는 고개를 돌렸다.
민석이 운동장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느긋한 걸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천재를 향해 곧게 꽂혀 있었다.

“너 요즘, 자주 멍 때리더라.”
민석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꺼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예전엔 늘 정답만 내뱉던 애가, 요즘은 그냥 멍하게 있는 게 많아.”

천재는 시선을 피했다.
흙바닥을 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 감정을 느끼면, 논리가 약해진다.”

민석은 잠시 천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어때서? 너 지금 더 사람 같아졌다는 뜻인데.”

천재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 같아졌다고? 감정 때문에 자꾸 흔들리는데, 그게 어떻게 좋은 건데.”
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와 혼란이 섞여 있었다.

민석은 잠시 말없이 천재 옆에 서서 운동장을 함께 바라보았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민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 사람이 뭔지 알아? 안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야.”
천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민석을 바라보았다.
민석은 담담한 눈빛으로 이어갔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그게 진짜 강한 거야.”

천재의 가슴이 순간 크게 울렸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나 형식적인 말이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의문에 대한 답처럼, 그의 귓가에 꽂혔다.

“너, 감정 때문에 약해진다고 생각하지? 근데 있잖아.”
민석은 천천히 손바닥을 펴서 흙먼지를 쓸어내리듯 허공에 흔들었다.
“그 약함 때문에 사람들이 너랑 같이 숨 쉬는 거야. 너도 이제 조금은 알잖아? 사람들이 왜 울고, 왜 웃는지.”

천재는 말없이 숨을 고르며 민석을 바라봤다.
가슴 한편이 아프고, 동시에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민석의 말은 비난이 아니라, 묘하게 따뜻한 끌어안음 같았다.

“…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감정이 왜 필요한지.”
천재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민석은 미소를 지었다.
“몰라도 돼. 그냥 느끼는 게 먼저니까.”

그 순간, 천재는 깨달았다.
자신이 ‘논리로만 무너지지 않으려던 시간’은, 사실은 ‘사람으로서 무너지는 연습을 피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5절 내면 정리: 약함은 인간의 일부


민석이 떠난 운동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천재의 마음은 전과는 달랐다.
가슴속에서 뭔가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고, 그 여운이 자꾸 되새김질되듯 마음에 맴돌았다.

‘강한 사람은 안 무너지는 게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그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때렸다.
천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감정을 다루려 했던 방식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나는 감정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발표 시간에도, 친구들 앞에서도. 말로는 잘 정리하려 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감정 앞에 서면 자꾸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고백을 마음속에서 꺼내는 순간 오히려 가슴이 한결 편해졌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오래 숨겨왔던 결함을 인정하자, 그 결함이 더 이상 자신을 옥죄지 않는 듯했다.

천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늦은 오후의 빛이 운동장에 길게 드리우며, 어둠과 빛이 섞이는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 자신의 마음 같았다.
흔들리고, 무너지고,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빛.

“약하다는 건 잘못이 아니구나.”
천재는 속으로 천천히 곱씹었다.
“약하다는 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건, 내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여전히 불안한 떨림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떨림조차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논리의 견고함만을 붙잡고 살아왔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이제는 그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게 괜찮다.”

그 말은 자기 위안이 아니라, 이제 막 도달한 새로운 자각이었다.
천재는 스스로의 흔들림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자신을 사람답게 만드는 과정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6절 감정 관찰 보고서: 감정의 약함, 사람됨의 증거


저녁, 책상 앞에 앉은 천재는 조용히 공책을 펼쳤다.
‘감정 관찰 보고서 28호’라는 제목을 또박또박 적는다.
하루의 끝마다 이 보고서를 쓰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되었고, 그 과정은 감정이라는 낯선 영역 속에서 길을 찾는 지도와도 같았다.

천재는 펜을 움켜쥔 채 잠시 멈칫했다.
운동장에서 느꼈던 흔들림이,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남아 있었다.
그 떨림을 다시 떠올리자 손끝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불편함을 도망치지 않고, 글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흔들렸다.
수업 중, 가족 이야기를 듣다 할머니의 병실 기억이 떠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왔다.
나는 감정에 약해졌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었고, 무너질 것 같았다.”

글자를 쓰면서, 천재는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도 따라왔다.
종이에 적힌 단어들은 더 이상 혼자만의 짐이 아니었다.
‘적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는 이어서 적었다.

“나는 흔들렸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억누르려 했으나, 결국 그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숨이 차고 눈물이 고였지만, 나는 버텼다.”

여기서 잠시 펜이 멈췄다.
천재는 창문 밖 어둑한 하늘을 바라봤다.
별빛 하나 없는 저녁 하늘이었지만, 그 검은 캔버스 위에도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약하다는 건 숨 쉬는 거랑 다를 게 없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감정은 나를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약함이야말로 내가 사람임을 알려준다.
강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 게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 나는 무너졌고,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게 나의 힘이다.”

천재는 마지막 문장을 고심 끝에 적었다.

“나는 아직 약하다.
그러나 감정을 느끼는 이 약함이,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그 문장을 적고 난 뒤, 천재는 펜을 내려놓았다.
보고서 위의 글자들이 마치 그날의 흔들림을 대신 안아주는 것 같았다.
가슴속 무거운 짐이 조금은 풀렸고, 천재는 처음으로 약함을 인정한 자신의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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