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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by 미려

경상도 여자로 살아온 지 40년,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간다.
투박한 말투와 강한 언행 때문에 종종 오해를 사곤 한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누나 같아서 무섭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성향이다.

그런데 이런 나도 한때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어느 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던 내 모습. 그 순간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마음 깊은 곳에 묵직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무뚝뚝하고, 때론 무심하다. 장녀로서 묵묵히 살아온 세월 속에서 나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단단해졌다. 말수가 적고 강한 아버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마음 여린 어머니. 그 곁에서 나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문득 눈밭에 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서울로 가는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다는 뉴스가 가득했다.

태화강역 플랫폼에 서서 ‘얼마나 많이 왔을까?’ 궁금해하며 기차에 올랐다.

빠르게 달리는 KTX가 아니라 조금은 느린 KTX를 택했다.

덕분에 차창 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이 되었다. 멀리 보이는 산과 들, 작은 집들 위에 소복이 쌓인 눈.

그 풍경이 놀랍도록 평온했다.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였는데, 그 속에서 차가움이 아니라 따뜻함과 평화가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기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눈 덮인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작은 플랫폼에 내려, 새하얀 눈 위를 걸어보고 싶었다.


진짜 평화로운 순간이란,
눈 덮인 땅에 내 발자국을 남기며 "뽀드득"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까?

경상도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눈 내리는 날이 되면, 나는 가끔 이런 평화로운 시간을 그리워한다.


눈이 내리는 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음이 복잡할 때, 모든 것이 하얗게 덮인 풍경을 보고 싶다.
삶이 버거울 때, 포근한 눈밭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경상도에서, 나는 오늘도 눈 내리는 어느 곳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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