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연구원, 오늘 새로 생긴 수제버거집 가기로 했지? 거기 트러플 프라이가 예술이라던데."
오전 11시 30분. 팀원들의 눈빛이 생기로 가동되기 시작한다.
판교의 점심시간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다.
누가 더 힙한 곳을 가는지, 누가 더 여유롭게 2만 원짜리 점심을 즐기는지 겨루는 소리 없는 런웨이다.
나는 모니터 속 LiDAR 데이터에 코를 박은 채 대답한다. "아, 저는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요. 그냥 근처에서 대충 먹을게요."
거짓말이다. 속은 아주 멀쩡하다 못해 배꼽시계가 정확히 11시부터 요동을 쳤다. 하지만 내 머릿속 레이저는 이미 오늘 아침 아내가 보낸 카톡 메시지를 스캔하고 있었다.
[여보, 애기 분유가 딱 한 통 남았네. 쿠팡 와우로 주문할게!]
분유 한 통에 4만 원. 내 점심 한 끼 1만 8천 원. 내가 오늘 버거 세트를 포기하면 분유 반 통이 생긴다는 계산이 선다.
팀원들이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방 깊숙이 숨겨온 낡은 보온 도시락을 꺼낸다.
어제저녁 먹다 남은 제육볶음이 밥 위에 얹어져 있다.
비좁은 탕비실 구석에서 차가운 밥을 씹으며 스마트폰을 켠다.
하필 알고리즘은 김 책임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준다. 육즙이 흐르는 버거 사진 밑에 달린 해시태그 #평일의여유 #판교맛집.
‘저 사람은 맞벌이니까. 부인도 대기업 다니니까.’
제육볶음의 고기 한 점이 유난히 질기게 느껴진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밤마다 나무를 그리지만, 이놈의 탕비실 전자레인지 냄새 앞에서는 철학도 예술도 사치다.
퇴근길, 마트에 들러 아내가 부탁한 우유를 집어 든다. 바로 옆 매대에 1+1 행사 중인 수입 맥주가 보인다. 평소라면 고민 없이 집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손이 나가지 않는다.
내일은 팀 전체 회의가 있는 날이고, 점심에 또 '맛집'에 가자고 할 게 뻔하니까. 내일의 점심값을 미리 저축하는 심정으로 맥주 대신 PB 상품 생수를 카트에 담는다.
현관문을 열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방금 배송된 분유 박스를 뜯고 있다.
"여보, 분유 도착했어! 이거 없으면 오늘 밤 큰일 날 뻔했네."
아내의 환한 얼굴을 보니 낮에 먹은 차가운 제육볶음의 서러움이 조금은 내려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식탁 위에 놓인 분유 통의 가격표가 자꾸만 1만 8천 원짜리 수제버거와 겹쳐 보인다.
내 LiDAR는 수백 미터 앞의 물체는 기가 막히게 잡아내지만, 정작 이 좁은 거실에서 내가 느끼는 이 '상대적 빈곤'의 사각지대는 감지하지 못한다.
밤 11시.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다시 펜을 잡는다. 오늘은 나무의 기둥을 유난히 굵게 그린다. 비바람이 불어도, 남의 집 정원에 핀 화려한 꽃들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보다 기둥이 먼저 단단해져야 할 것 같아서.
기록지에 적는다.
[지출: 우유 2,900원. 절약: 점심값 18,000원. 나의 가치: 분유 한 통 지켜냄.]
이게 100억 자산가로 가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쫌쫌따리 궁상을 떠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나는 오늘 나만의 '품질 관리'에 성공했다는 것. 불량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자리를 지켜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