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림 Sep 04. 2024

시간을 담은 선물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색이 벗겨지고 찌그러진 텀블러를 눈여겨보았는지 친구가 나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꼭 이걸로 가지고 다니라며 당부까지 했기에, 다음 날 하루 종일 보란 듯이 들고 다녔다. 사실 그즈음 새로 생긴 텀블러가 하나 더 있었다. 두 개가 있으면 꼭 비교하게 되는 게 사람의 뿌리칠 수 없는 속성일까?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건 그리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요즘은 텀블러가 다양한 디자인으로 유행처럼 퍼지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텀블러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그 이름도 생소해서 차라리 보온병이라고 하면 더 잘 알아듣던 때였다. 시작은 커피였다. 조금씩 빠져들다 보니, 어느 순간 밥 먹듯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잠 깨는 용도로 충분하였지만 갈수록 감각을 자극했다. 혀끝을 타고 들어온 즐거움은 코로, 눈으로, 다시 손으로 퍼져 나갔다. 커피를 갈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을 때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과, 졸졸 떨어지는 맑은 방울을 보고 있자면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렇게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게 되었으니, 텀블러는 아침 출근 시간의 필수품이 되었던 것이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일 하면서 늘 뭔가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다는 것. 자연스레, 마시는 물의 양도 늘고, 커피 이외에 즐기는 차 종류도 다양해졌다. 종이컵 사용이 급격히 줄어든 건 물론이다. 아침에 진하게 내린 커피를 출근길에서 반 정도 마시고, 일터에 도착하면 나머지 반에 뜨거운 물을 더 붓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신다. 점심을 먹고 나면 따뜻한 녹차 한잔, 집으로 돌아갈 무렵엔 카페인 걱정 없는 캐모마일이나 우엉 우린 차를 담아 마신다. 딱히 차가 없을 때는 따뜻한 물도 좋다.     


   주변에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지, 늘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나보다. 그중 누군가가 텀블러 여기저기에 있는 긁힌 자국과 찍혀서 움푹 들어간 모서리를 보았던 것이다.      


‘저 사람은 이게 필요할 것 같은데, 받으면 좋아할까?’

‘너무 무거우면 안좋을 것 같고, 크기는… 저 사람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 쏙 들어갈 수 있는 게 좋겠어.“

‘색은 어떨까? 저 사람은 한번 쓰면 오래 쓰니까, 질리지 않는 색이 좋겠지?’

‘음… 이런 디자인은 예쁘긴 한데, 실용적이지는 않을 것 같고.’     


   오로지 나의 상상이지만, 친구가 내게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만큼은 나에 관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을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 그 시간을 담아 건네는 것이 선물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매일 아침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돌리는 기념품과 어찌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어김없이 선물 받은 텀블러 속, 그가 채워 준 시간에 나의 즐거움을 얹었다. 아무런 색상이 씌워져 있지 않아 끍힐 염려가 없는 깔끔함과, 길이 막혀 늦게 도착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커피의 따뜻함, 그리고 차에서나 책상에서나 팔을 뻗으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 이것은 마치 재단사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옷을 입는 기분이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텀블러와의 인연은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손에 들고 다니다 보니 짐이 많거나 정신없이 바쁜 날이면 다른 데에 두고 오기 일쑤였다. 휴대폰이 사라지면 금방 알아채듯 나의 텀블러도 마찬가지였기에, 몇시간 정도 다른 곳에 있어도 이런저런 수소문 끝에 찾아올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없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땐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며칠 아쉬움이 가시질 않았다. 어떨 때는 창가에서, 어떨 때는 다른 사람 책상 위에서, 어떨 때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며칠 동안 사라진 텀블러를 찾는다는 내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져, 예상치 못한 사람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들고 온 적도 있었다.     


   오늘 점심을 먹고 버릇처럼 텀블러를 들고 벤치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누군가와 잡담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잡담을 나눌 사람이 없다. 텀블러를 친구 삼아 옆에 놓고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 몽실몽실 피어오른 구름이 커피 거품을 닮아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내 옆에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벌써 10년. 그동안 수 많은 텀블러가 내 옆을 서성였건만, 늘 내 옆에 이 친구가 있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인연이라도 있는 듯하다. 앞으로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이 친구에게 더 담을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