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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Oct 20. 2024

낯선 대화의 시작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혼잣말을 했다. 만원 지하철이나 어린이날 놀이공원에서라면 모를까. 평소보다 특별히 북적이지도 않는 길에서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때 한 사람씩, 혹은 두세 명씩 짝지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하루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여기 있을까?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그들 모두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붙잡혀 종일토록 인사만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너무 많네….” 얼토당토않은 공상 속에서 나는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혹시 한두 명만 있었다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어 볼 수 있었을까?


   몇 해 전, 한창 등산에 빠져 살 때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하길래, 그럼 나도 등산하면서 퇴근해보자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마침 집으로 오는 길에는 산 아래 긴 터널이 하나 있다. 터널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산을 넘고 반대쪽으로 내려와 다시 버스를 타는, 이상한 퇴근길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나, 야근하는 날은 불가능하니 매일 그런 이상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힘들고 하기 싫은 날은 내 박약한 의지 대신 날씨와 환경 탓을 하면 되었다. 그렇게 불규칙한 리듬감으로 실천하니 횟수는 적더라도 생각보다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 길이야말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산 위에는 등산로가 있었지만, 저녁 여섯 시 전후로 어떤 사람이 아래 널찍한 길을 놔두고 이 길을 걸어갈까. 그렇기에 나는 그 노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말끔한 슈트는 아니지만 등산복 차림은 더더욱 아닌 그런 모습으로 산을 넘어가는 내 모습이 뭔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하산 길에 잠시 경치를 구경하는 듯 보였던 부부는 해 질 무렵 서류 가방을 들고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는 내게 어디로 가냐고 먼저 말을 건넸다.


"퇴근하는 중이에요."


부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였다.


"집이 어딘데요?"


   호기심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아주머니가 물었다. 비밀스러운 것을 숨겨 두고 보여줄까 말까 하는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집이 산꼭대기에 있다는 식의 농담을 하기에는 뭔가가 아직 부족했다.


   아저씨는 내 가방에서 삐져나온 물병을 보고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가져온 물이 바닥났는데, 내려가는 길을 잃어 헤매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물병을 건넸고, 아저씨는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비스킷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우리 집 딸도 얼마 전에 취직했는데 …. 걔도 이렇게 퇴근해보라고 할까?"

"말이 되는 소리를 …."


   아주머니는 남편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내다가 나를 흘끔 보더니 가벼운 미소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세 사람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활짝 펴진 얼굴은 그 부족한 뭔가를 채워주었고,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과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눈 적이 또 있었을까? 한창 사회 초년생인 부부의 딸, 은퇴 후 생긴 부부의 등산 취미, '집이 대체 어디길래'로 시작한 동네 정보 등등, 이야기는 시원한 산바람을 타고 술술 펼쳐졌다. 부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동에 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아파트가 너무 친환경적이라 모기가 많다는 이야기, 인테리어 공사를 잘못하여 고생한 이야기, 이웃집에 대한 시시콜콜한 험담도 재미있었다.




   사실 얼마 전에도 낯선 사람과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늦게까지 야근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녁 식사를 미루고 일을 먼저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집에 늦게 가기도 싫었지만, 밥 때문에 일의 흐름이 끊기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습성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밥은 밥대로 못 먹고, 일은 일대로 늦게 끝나고 말았다. 식당이 문 닫을 시간이었지만 고픈 배는 좀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에 버스 정류장을 따라 걸으며 먹을 만한 데를 물색하였다. 마침 작은 식당에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었다. 사장님인 듯한 아주머니가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었다.


"혹시 식사할 수 있을까요?"

"혼자세요?"

"네."

"들어와 앉으세요."


   문 닫을 시간인데도 흔쾌히 맞이해주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밥 먹으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방에서 나오지 않던 나를 식탁도 치우지 않고 기다리셨던 어머니의 목소리 같았다.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주문을 했지만, 이내 들려오는 조리도구 소리는 가볍게 찰랑거렸다. 사장님이 먼저 얘기를 꺼낸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일찍 문 닫고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일찍 문을 못 닫았네요."

"무슨 일이신데요."


"오늘 재료가 일찍 떨어져서 국수 주문은 못 받는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어떤 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장사를 똑바로 하라고 난동을 부리더라고요. 그릇이 다 깨지고 난리가 났어요."


   사장님의 목소리는 잠시 커졌다가 한숨과 함께 다시 잔잔해졌다. 식당 옆 빵집 사장님이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들어와 끌고 나가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며,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말씀은 젊은 시절 대기업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경험했던 모욕적인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어릴 때 꿈이 군인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아직도 군인처럼 튼튼하니,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는 거라고 하셨다. 그날 밤 사장님은 그렇게 나의 밥 동무를 해주었고, 나는 그 분의 속상한 마음을 들어주었다.




   어릴 때 읽은 동화는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로 채워져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대문이 열려있는 집에 들어가 물 한 모금을 청하고, 한밤중 길을 잃고 낯선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이야기. 나무꾼은 호랑이 목구멍에 걸린 뼈를 빼주고, 호랑이는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 낯선 그들과 연결되고 공감하며, 흩어진 의미를 모으고 싶은 우리 모두의 바람과 기대가 그런 이야기들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나도, 노부부도, 식당 사장님도 어제는 나그네로, 오늘은 나무꾼으로, 내일은 호랑이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동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람이, 어떤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어야 낯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람이 많다고,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고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거리가 멀고 사람도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 적당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낯선 이에게 언제 말을 걸고, 어떻게 공감해주어야 하는지는 더더욱 어렵다. 어쩌면 그 알 수 없는 적당함을 우리는 우연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우연에 대한 기대를 버릴 생각이 없다. 지금껏 내 삶의 크고 작은 만남은 알 수 없는 우연으로 시작되었으니까. 그걸 필연이라 여기려고 나는 그저 의도와 의지라는 약간의 양념을 뿌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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