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산책길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by 공림

지난주 내내 비가 온 탓에 땅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었다. 덕분에 개천에 물이 많이 늘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기 등짝보다 큰 가방을 메고 개천 옆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흐르는 물에 담금질을 한다. 나뭇가지를 하늘로 쳐들자, 물방울이 후두두 개천 위로 떨어졌다. 햇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보석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개천을 멀찌감치 돌아 산을 올랐다.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지만, 이번엔 특별히 계곡 물소리가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들린다. 개천에 비해 경사가 급한, 계곡만이 낼 수 있는 경쾌한 소리. 걸음걸이가 빨라지고 심장도 속도를 낸다. 여름 내내 뜨겁고 축축한 바람을 견뎌야 했던 나뭇잎들은 가을 냄새 나는 바람을 반긴다. 앞뒤로 흔들리는 잎은 내게 묵례를, 좌우로 흔들리는 잎은 내게 손을 흔든다. 내 마음대로 상상하며 걷는 게 산책의 매력이니까. 비 양이 많았던지 계곡 옆 좁은 길은 아직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도 물소리와 제법 잘 어울린다. 덕분에 늘 가던 길을 놓치고 말았다. 낯선 풍경이 이상하여 뒤돌아보니 건너야 했을 돌다리는 이미 보이지 않고, 나무에 둘러싸여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잃고 말았다. 계곡 옆 좁은 땅에 심어진 고추와 깻잎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런 곳에서 채소 기르는 사람이 있다니….


달력은 9월 초순인데 텃밭 속 채소들은 봄비를 맞은 듯 푸릇푸릇했다. 텃밭 입구에 낡은 나무 화살표가 있었다. 어깨높이만 한 장대에 붙어 있는 모양을 보니 만화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앞서가던 누군가가 화살표 방향을 엉뚱하게 돌려놓은 건 아닐 테지? 뭔가 오싹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화살표대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고 화려하게 날갯짓하는 나비들이 보였다. 마침 꽃 가까이에서 화사한 차림의 중년 여성 두 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따라온 이곳에 사람이 보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쪽으로 계속 가면 어디가 나와요?”

“계속 가면 정자가 하나 나와요.”

“처음이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두 분은 사진 찍는 걸 멈추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 동네에 내가 아는 정자가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두고 하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걸 찾으면 대체 여기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사를 하고 몇 걸음 옮기자 빼곡한 나무 사이로 무언가에 반사된 빛이 반짝거렸다. 고개를 들어 경사진 숲을 올려다보았다. 대규모 비닐하우스의 지붕이다. 이 산속에 저런 게 있다니. 식물원인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수풀로 가려진 좁다란 길을 헤치고 올라가 보았다. 세상에…. 이곳에 어찌하여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까.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놀라 하늘을 덮고 있는 포도송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요즘 포도가 제철인데, 어찌 운이 좋으면 나무에서 바로 딴 싱싱한 포도를 사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쌈 채소, 한 봉지 천원!”


비닐하우스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 그 중간에 있는 허름한 집 기둥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포도가 아니라 쌈 채소라니. 기둥 옆으로 냉장고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흔히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유리문이 달린 냉장고다. 김 서린 유리문 안에는 비닐봉지에 쌓여 있는 채소가 그득하다. 냉장고 옆으로 두 사람 정도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농로가 있고, 그 위쪽으로 계단식 밭이 펼쳐져 있었다. 밭 건너편에는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떤 할머니가 쌀자루로 등짐을 만들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뒤따라온 중년 여성 두 분이 가까이 다가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할머니, 요즘 건강이 어떠세요?”

“그냥저냥,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뭐.”


“에그…. 그나저나 옆집 친구분이 돌아가셨다면서요. 요즘은 말동무가 없어서 어떡해.”

“그 할멈, 아직 살아 있어. 오늘 아침에도 밥을 같이 먹었는걸.”


“어머, 그래요? 한동안 편찮으시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른 분인가….”

“있다가 없다가 그래.”


있다가 없다가? 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두 웃음이 터졌다. 어떤 인연으로 이분들은 저리도 찰지게 말씀을 나눌까. 이곳은 아무나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말을 걸어도 친구가 되는가 보다. 이 산속, 작은 분지에 이런 동화 같은 마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틈에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나타나 냉장고 옆 의자에 앉았다. 채소 한 봉지를 사려고 주머니를 뒤졌으나 아차, 지갑을 두고 나왔다. 저거 한 봉지 주세요, 라고 말하고는 당황하는 내게 여자분이 얼른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아, 이거, 초면인데….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몇 봉지 사려고요. 이것도 드릴까요?”


그녀는 가방을 뒤지더니 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예상보다 길어진 산책에 마침 배가 출출하였으니 이런 반가운 선물이 또 있을까. 염치 불고하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할머니께 여기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이쪽은 지름길이고, 저쪽은 큰길이고.”


할머니는 귀찮은 듯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아기자기한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름길을 택했고, 여자분들은 큰길 쪽을 택했다. 지름길은 언제나 좁다. 대신 계곡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말이 지름길이지 경사가 급한 등산로였다. 과자는 제법 맛있었다. 아니 꿀맛이었다. 먹으면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빵이 생각났다.


여름내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다리를 스치며 소리를 냈다. 스친 건 풀 뿐만이 아니었다. “쉬쉬 쉭….” 하마터면 갑작스럽게 등장한 뱀을 밟을 뻔했다. 그 와중에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얼른 카메라를 켜는 여유를 부렸지만, 간담이 서늘하다. 나는 얼어붙었고, 그는 유연했다. 왕거미와 눈도 마주쳤다. 좁은 길, 양쪽 나무 사이로 정교하게 쳐 놓은 거미줄에 얼굴이 통째로 걸려들 뻔했다.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왕거미가 내 눈높이에서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헉 소리와 함께 제동이 걸린 발은 뒤로 미끄러졌다. 미션을 수행하듯 실오라기 하나 건들지 않고 허리를 굽히고 비틀어 통과해야 했다. 길을 가르쳐준 할머니 얼굴이 장난스럽게 아른거린다. 대체 이곳으로 사람이 다니기나 하는 걸까. 그렇다면 저 뱀도, 저 왕거미도 나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집에 들어가면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다 했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겠지?


그날 저녁, 나도 식구들에게 환상적인 모험담을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가로 맛있는 빵도 제공했다. 미션의 마지막 장소, 숲길 끄트머리엔 재즈 음악이 흐르는 빵집이 있었다. 그윽한 커피향과 고소한 빵 냄새가 재즈를 타고 퍼졌기에 누구든 그 옆을 지나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빵이야 어딜 가든 없겠냐만, 그날 사 온 빵은 고된 신병 훈련소를 마치고 나올 때 먹었던 초코파이와 견줄만했다. 맛도 스토리가 있어야 오래간다.


개천 옆에서 보석을 만들던 아이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게 손 흔들었던 나뭇잎,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물소리와 계절을 거꾸로 사는 텃밭 채소들. 어느 틈에 나타나 채소 한 봉지와 과자를 준 중년 여성과 무표정하게 지름길을 알려준 할머니. 카메라를 피해 도망간 뱀과 집어삼킬 듯 노려보던 왕거미. 아,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산속 포도송이도 빼놓을 수 없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모든 게 기억의 맨 앞자리에 있다. 계절이 지나 하얀 눈 속에 잠길 때가 되면 이 모두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별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꿈을 꾸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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