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따라 내려가는 저 가벼운 나뭇잎처럼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by 공림

오랜만에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할 수 있는 날이다. 마음이 가볍다. 영화관? 서점? 쇼핑몰? 아니면 소문난 맛집? 평소 이 시간대에 할 수 없는 일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우선순위에서 한발 앞서는 게 있었다. 대낮에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자보는 것. 소박해 보이지만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날은 그리 흔치 않다. 사실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잠을 설치고 입안도 헐었다. 다른 걸 해볼 에너지도 없었다.


며칠 비가 오다가 오늘은 운 좋게도 하늘이 맑다. 운전대를 잡고 라디오를 트니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파란 하늘에 구름이 연어를 닮았다. 강산에의 힘 있는 목소리가 갑갑함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연어의 힘찬 모습인데, 오늘은 다른 가사가 귀에 꽂힌다.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난 쉴 수 있겠지.”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니.


“아빠, 점심 먹었어?” 집에 들어오자, 대학생 딸이 혼자 나를 맞이했다. “아니, 아직.” 시계를 보니 1시가 조금 넘었다. 밖에서 먹고 들어올 생각도 했지만, 집에서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을 작정이었다. 어제 자원봉사를 하고 밤늦게 집에 온 딸은 오늘 아무 일정이 없나보다. 빙긋 웃더니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점심을 먹었냐는 말을 듣고 나니 라면 생각이 싹 달아났다. 인공지능이 아닌 감수성 풍부한 인간은 이 물음을 같이 먹자는 메시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아무거나 후딱 먹으면 그만이지만, 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시간에 집에서 같이 먹는 것도 괜찮은 듯하다.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었다. 어머니께서 주신 시래기도 있고, 지난 주말 사다 놓은 가지가 좀 있다. 솥에 밥은 있으니, 시래기 된장찌개와 가지볶음을 해보자고 주섬주섬 재료들을 꺼냈다. 안쪽에서 줄줄이 뭐가 더 나온다. 고추, 근대, 콩나물, 버섯, 양파, 부추….


시래기 하나만 생각하고 있다가, 기왕이면 이것저것 다 넣어 보자고 고추, 근대, 콩나물, 버섯을 몽땅 털어 넣었다. 된장이란 게 참 신기하다. 이 땅에 나는 모든 채소와 참 잘 어울린다. 한쪽에서 찌개가 끓고 있는 동안, 다른 쪽에서 가지와 부추, 양파와 버섯을 넣고 볶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소리만큼이나 마음도 바쁘다. 인생이 그렇듯, 음식도 타이밍. 배에서 신호가 올 때 쏙 들어가 주어야 한다. 음식 만드는 사람은 “맛있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법이다.


된장찌개와 가지볶음을 식탁에 올리고 밥을 담아 식탁 양쪽에 놓았다. 구수함과 고소함이 아주 잘 어울린다. “점심 먹자. 식기 전에 빨리 나와.” 웬일로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을 열고 나타난 딸은 반갑게 의자에 앉는 대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방금 먹었는데?”


아, 이런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먼저 물어보지 않은 내 불찰이긴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삶은 불쑥불쑥 가르친다. 순간, 집에 오는 길, 꽉 막힌 도로가 생각났다. 1차선보다 2차선이 잘 빠지길래 차선을 옮겼더니 앞서가던 택시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비상등을 켜고 멈추어 섰다. 경적을 울려 보았으나 막무가내다. 덕분에 신호를 두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봐. 같이 먹으려고 만들었는데….”

“지금은 배가 너무 부른데…. 있다가 먹을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힘찬 연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인생은 리듬을 한번 놓치면 손뼉을 칠 때마다 엇박자가 난다. 그렇다고 내 손뼉에 노래를 맞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어는 무슨…. 강을 따라 내려가는 나뭇잎이 떠올랐다. 딸에게 향하던 마음을 급하게 내게 돌리며 가볍게 내려가기로 한다. ‘아, 내가 언제 나를 위해 이런 요리를 한 적이 있나.’ 호화롭지는 않지만, 라면에 비하면 근사한 식탁이다. 오늘 하루 수고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덤으로 계란프라이를 부치는 여유까지 부렸다. 탱탱한 노른자를 밥에 올리니 이제 정말 만찬이라 불릴 만하다. 주방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왔다. 따끈하고 진한 된장찌개를 떠서 입안에 넣었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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