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한 동네에 20년 넘게 살면서 뒷산을 앞마당처럼 다녔어도 그 경사진 땅을 어떻게 오르고 내렸는지 알지 못했다. 무의식적이며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다리를 아예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내디디며 앞 다리에 무게를 싣고, 그 힘으로 뒷다리를 들어 앞으로 내밀면 되는 줄 알았다. 발목과 무릎을 다쳐 한 달여 동안 걷기 어려웠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다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그런 말을 다쳐보고 나서야 비로소 할 수 있었다. ‘아무 신발이면 어때. 아무 양말이면 어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발에 맞는 등산화를 찾고, 두툼한 양말을 고르고, 무릎 보호대를 알아보았다. 가벼운 등산스틱도 장만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숲속, 완만하게 펼쳐진 등산로가 급하게 경사를 이루는 곳에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나무뿌리들이 반쯤 흙 아래로 묻히고, 반쯤 흙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곳 경사를 오를 때면 마른 흙에 미끄러지는 발을 그들이 떠받치고 몸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숱하게 이곳을 지나쳐 왔건만, 나는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쳤다. 산이라는 단어 속에 모든 것을 파묻고 고개를 들어 하늘만 보았지, 무엇을 밟고 나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뿌리,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계단이 거기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는 원래부터 있던 건 아니었다. 바람에 날려 그곳에 떨어진 씨앗은 작은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으며 위로만 오른 것도 아니었다. 더 거칠고, 더 단단한 땅속을 헤집으며 아래로 내려가고 옆으로 기었다. 실핏줄같이 연약한 뿌리는 벌써 알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폭풍우와 눈보라를 끄떡없이 견디려면 깊고 길게 손을 뻗어 단단한 암반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을 앞서간 씨앗은 다리 달린 동물들에게 자기 뿌리가 계단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다리 두 개에 온몸을 의지한 사람들의 절박함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가을 단풍이 짙어지는 가을 오후, 내가 딛고 오른 그 뿌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밟히고 깎이는 시련을 견디며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숨 쉬는 계단. 그 경이로움에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해 겨울, 오랜만에 나타난 따뜻한 햇살에 겨울의 끝자락은 얼음을 녹일 듯 말 듯 간을 보는 듯했다. 그동안 움츠렸던 몸이 먼저 반응하듯 산으로 향했다. 뒷산 한 바퀴 도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고 자신만만했던 나는 한번 나선 길을 되돌리지 못하고 반질반질한 얼음을 피해 조심조심 어색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그리고 그곳, 살아 숨 쉬는 계단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감정이 벅차올라 깊은숨을 쉬었다.
그곳엔 두툼하게 얼어버린 얼음 위로 마른 솔잎이 뿌려져 있었다. 솔잎의 온기가 얼음을 파고들어 잎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 그곳을 마주한 사람은 길옆으로 벗어나 눈을 헤집고 마른 솔잎을 주섬주섬 주워 왔을 것이다. 몇 사람의 수고로 솔잎이 얼음 속을 파고들 무렵, 뒤이어 온 사람들은 더 많은 솔잎을 주워 와 그 위에 뿌리고 갔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구를 위하여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놓고 갔다. 오랜만에 나온 햇살이 반가워 집 밖을 나선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었을까. 겨우내 굳은 근육이 풀어지기는커녕 더 바싹 긴장해야 했을 많은 사람들이 그 솔잎 덕분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도 나무뿌리를 닮아 얼음 위로 계단을 만들었다.
뒤 이어 오는 사람을 위해 계단을 놓는 사람이 어디 그들뿐일까. 얼마 전 감기 기운이 있어 상가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키 작은 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상가 현관문을 몸으로 밀며 들어왔다. 아이 키보다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유리문이 더 육중해 보였다.
“학교 끝나고 학원 가나 보네.”
혼잣말을 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는 먼발치에 있는 나를 보고 무거운 유리문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이는 내 허리 아래서 문을 잡고 있었고, 나는 얼른 문 중간을 잡았다.
“고마워.”
“아니에요.”
짤막한 대화 속에서 진한 미소가 우러났다. 바로 옆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벌써 종종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작은 아이가 나를 담고 세상을 담았다. 그 감동이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현관문을 볼 때마다 생각난다. 문은 공간을 열고, 사람은 마음을 열어 준다.
앞서간 모두는 길을 낸다. 문을 잡아준다. 그런 도움을 자랑하지도 않고, 알아봐 달라는 표시도 없다. 그저 누군지도 모를, 무엇인지도 모를 존재를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살아 숨 쉬는 계단을 만든다. 계단을 계단인지 모르고 오르는 무지도, 계단을 오르며 온전함을 뽐내는 자만도 내치지 않는다. 그들이 소리 없이 숨어 있을지라도 계단이 계단임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