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자니 오른쪽 볼 위쪽이 시큰거린다. 무언가가 살짝 할퀴고 간 느낌에 손가락을 얹어 보았다. 불그스레한 상흔을 거울 없이 마음으로 보았다. 볼살이 텄다.
그제와 어제 이틀 연속,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뒷산을 산책했다. 보통 같으면 햇빛을 막아주는 모자를 썼겠지만, 겨울 찬 바람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섰는지 일부러 자리에 둔 채 나왔다.
한동안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 연말에 몰리는 직장 일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올해를 넘기지 말자는 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소통이 대세인 시대에 스마트폰 일정 관리 앱이 발달하여 그런지, 요즘은 꽉 찬 달력에 뭐 하나 끼워 넣기가 쉽지 않다.
밥 같이 먹자고 일 년 내내 문자로만 인사하는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잡으려니 그들의 앱에도 2주 뒤에나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제자들도 자기 밥벌이를 하느라 바쁘다가 해 넘기기 전에 보러 온다고 했다. 그럼 그럼, 당연히 봐야지. 요즘은 예식장 예약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예전 같으면 겨울은 결혼 비수기였지만, 요즘은 이 시기도 1년 전에 예약해야 겨우 원하는 곳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12월 결혼식이 늘었고,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 그런지 마음 아프게 떠나는 분도 늘었다.
꽤 오랫동안 산책의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좋아하는 걸 못 했더니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창밖에서 햇빛이 문을 두드리고 나를 유혹하듯 불러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찬 바람에 따가운 햇살을 몇 시간 맞았다고 볼살이 트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부가 노화된 건지, 연약한 아기 살로 되돌아간 건지, 아니면 바람과 자외선의 강도가 더 세진 건지 모르겠다. 설마 아기로 되돌아갔을까. 내 탓보다 남의 탓을 하는 게 쉬우니 나도 이참에 자외선 탓을 해볼까?
며칠 전, 타 부서의 부서장을 맡고 있는 그가 엉뚱한 변명을 하는 바람에 나에게 불똥이 튀었다. 외부 컨설팅을 받고 오더니 지금껏 안 하던 프로젝트를 새로 만들겠다며 갑작스레 발표를 해버렸다. 후폭풍은 거셌다. 모름지기 1년 농사란 연초 계획에 따라 지어야 하는 법인데, 12월 연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평가해야 하는 바쁜 시기에 새로운 뭔가를 하라니…. 항의가 이어지자, 그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끌어들였다. 내가 요청하여 계획을 급하게 세우게 되었다나….
갑자기 내가? 구석에서 조용히 있다가 모든 일이 내 탓이 되었다.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오해는 다음 날 쉽게 풀렸다. 그게 말이 돼? 그럴 리 없어. 아무도 그의 변명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마 그럴 것 같다는, 조금의 개연성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억울함 때문에 없는 시간을 쪼개 써야 했을 것이다. 신뢰가 깨진 자리에 실망감이 더해지긴 했다. 개연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볼에 로션을 듬뿍 발랐다. 한여름도 아니고 자외선 탓을 하다니. 그게 말이 돼? 그럴 리 없어. 모름지기 한 겨울에는 로션을 넉넉히 잔뜩 발라 주어야 한다. 피부가 탄력을 잃어가나 보다. 나도 한때 기름기 흐르는 여드름 난 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