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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pr 03. 2024

심채경을 좋아하세요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작년에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읽은 책인데 마치 6번은 읽은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습니다. 뭐랄까, 이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닮아있었습니다. 

'문체가 닮은 건 아닌 거 같은데..'


구조가 닮은 건지 아니면 작가님의 정신세계가 닮은 건지, 그냥 착각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무소유>의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 수업 과제 덕분에 <무소유>를 알게 되어서 그 짧은 과제 기간 동안 3번을 재독 했습니다. 과제가 끝나고도 몇 번은 더 읽었죠. 매력 있었습니다. 가장 큰 매력은, 뭐랄까, 스님은 A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곧이어 갑자기 완전히 다른 주제인 B로 넘어갑니다. B를 한참 이야기해서 그렇게 A를 잊어가고 있을 때쯤, A와 B가 합쳐지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하나의 예술이었죠.


저는 이 책 서문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죠.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말입니다. 



예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비밀번호 분실 대비용 질문을 고르고 그에 대한 답을 적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려동물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영화 제목 따위의, 본인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치트키를 설정해두라는 귀여운 요구였다. 골라둔 질문과 답을 모두 맞히면 비밀번호를 새로 정할 수 있게 해줬다. 나는 질문 중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을 고르고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를 적어넣곤 했다. 문고본의 해진 책등에 테이프를 덧발라가며 그야말로 닳도록 읽은 책이다.


이 구절을 읽고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래, 내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구나. 작가님이 나보다 더 무소유를 좋아하시는 분이었구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입니다. 




의미가 없으면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거죠. 연애를 하고 있는데, 이 친구와 언젠가는 헤어질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굳이 만나야 할까? 어차피 끝이 보이는데 지금 헤어져야 하는 거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의미가 없다고 느낀 거겠죠.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요. 


내가 하는 일, 삶도 그랬습니다.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면 흥미가 생기질 않았습니다. '이걸 왜 해야 하지?', '왜 살고 있는 거지? 내 삶의 의미는 뭐지?' 그렇게 4년이 넘도록 항상 '의미'만을 생각해 오던 제가 어느 순간 놓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의미를 찾아다니는 것이 오히려 항상 있는 의미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내 삶의 의미는 뭘까?'라는 질문, '이 일의 의미는 뭘까?'라는 질문이 오히려 의미를 성취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라톤 선수가 걷는 내내 '달리기의 의미는 뭘까? 어차피 결승선에 도착하면 끝나잖아.'라고 하는 느낌이려나요. 생각해 보면 어차피 죽을 건데도 살고 있으면서 연애의 끝이 보인다고 지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부터가 참으로 어린 생각이었습니다. 


그보다도 더 저를 아프게 한 건,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하면 의미가 내 눈에 보이기도 전에 그만두니까 삶이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딘가에 정착한 느낌이 들지 않고 수면 위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죠. 저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군대에서도 오랜 시간 사람들과 함께하며 의미를 발견하면서 세상만사가 이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는 건 합리성을 핑계로 한 포기였던 셈이죠. 


그렇게 생각한 뒤로, 그리고 <돈키호테>를 읽은 뒤로도 저는 점점 그저 열정이 목적인 사람들. 남들은 저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나 하고 의심하지만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미쳐 있는 사람들. 바깥에 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열정, 집중, 자유, 몰입이 그 자체로 목적인 사람들이 참 좋아졌습니다. 그걸 하는 동안은 너무 좋으니까,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임을 아는, 그런 사람들.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이공계 대학원에서 흔히 ‘랩 미팅’이라고 부르는 이 회의는 그야말로 대학원 생활의 꽃이다. ‘꽃 같다’는 말이 중의적으로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하지 않겠다. 회의 준비로 이틀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하루 전날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수식의 오타나 그래프와 씨름을 하다가, 살벌한 회의 끝에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덕이다 보면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흔한 대학원 생활이다. 그런데 내가 있던 연구실은 좀 달랐다.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각자 얼마나 멍청한 일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씩 웃으며 당신께서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목성이나 토성의 관측자료를 얻은 것에서부터, 동료 학자 누구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으며, 행성 대기 모델 계산 코드를 어떻게 개선했는지에 대해서, 마치 일주일 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랩 미팅의 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온 당신의 모델을 육십이 넘도록 끊임없이 바꾸고 고치고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즐겁게.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저는 '동경한다'는 말을 예전에는 그렇게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뭔가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달까요. 그런 사람들이 멋지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할 거 같아. 혹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 보는 것으로 만족해. 라고 생각하는 그 느낌이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웃기게도 자꾸만 동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안내합니다. 점점 그들을 닮아가죠. 그래서 '이 사람 정말 멋있다.'는 동경의 느낌이 들면, 직후에는 몰라도 몇 년이 지나면 내 삶의 가치관이나 방식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항해의 방향이 단 1도만 달라졌지만, 그동안 흘러온 삶이 있으니 점점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닮아가면 동경은 더욱 커집니다. 어쩌면 작가님도 그러지 않을까요. 



내 지도교수께서는 그런 메일을 받고 나면 “이 친구는 머리 아픈 걸 보내주면서 뭘 즐기라고 한다니” 하며 괜스레 핀잔 섞인 한마디를 하시는데, 사실 본인도 이미 즐거움에 미소를 짓고 계신다. 그런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도 일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듯이. 그리고 그런 분을,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천문대에 관측 제안서를 쓰고 모델을 만들고 논문도 쓰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매일 만끽하며 지내는 분을 지도교수로 두었다는 사실이 내게도 일의 즐거움 중 하나다. 



여러분은 무엇을 동경하시나요? 어떤 사람들을 동경하시나요? 여러분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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