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과의 첫 만남은 기억 속에서 흐릿한 법
사람들의 첫 만남 썰을 들어보면, 대부분은 사랑에 빠졌던 상대를 만났을 때, 머릿속을 강타하는 한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의 미소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거나,
먼저 음료수를 건네주는 게 멋져 보였다거나,
멀리서도 압도되는 피지컬에 감탄했다거나.
그 외에도, 한 장면씩 되새길 법한 순간들이
그렇게 마음속에 감정의 씨앗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다정과 여지, 그리고 화사함이 한데 얹히며
마음을 꽃피운 그때가,
짝사랑의 시작이라고.
소설 속에서도, 드라마 속에서도 남자 주인공의 첫 등장 장면에는 많은 힘이 들어가 있다.
멋들어진 묘사와 반짝이는 이펙트에 효과음.
미래의 사랑을 암시하듯, 주인공이 그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를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널 좋아하게 되는 길을 에둘러 걸을 수 있었을까.
내 친구들 역시 그랬다.
눈에 불꽃이 튀듯, ‘아, 얘다.’ 싶었단다.
첫사랑과 첫 시작과 첫 만남.
보통의 처음은 또렷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 기억은 흐릿했다.
기록조차 하지 않아 어림짐작만 가능한 지금.
그냥 키가 크고, 운동을 좋아하게 생긴 그런 아이.
그럼에도 묘하게 서늘한 눈매가 기억에 남는.
미묘한 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너, ㅇㅇㅇ 친구지?”
나른한 오후, 부드러운 햇살을 등지고 네가 말했다.
나는 너를 몰랐다.
하지만 너는 나를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날 몇 번 봤다나.
통성명을 마친 뒤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먼저 살갑게 다가오는 네가 궁금해진 건 조금 더 나중이었다.
처음엔 이름도 자주 까먹어서,
곧잘 “야” 하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너는 내게 명찰을 보여주며 외우라고 했다.
너를 따라 이름 석 자를 천천히 읊었다.
“이젠 잊어버리지 마.”
그 마법 주문 덕분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네 이름을 잊은 적이 없어.
생각보다 취향이 겹쳤던 우리는
간식을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
과자. 초콜릿. 젤리.
“나는 다른 사람 취향을 기억하는 걸 좋아해.”
내가 초콜릿 과자를 고를 때,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때는 몰랐다.
이런 사소한 순간까지가 내게 큰 자국을 남길지.
이렇게, 너를 좋아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너와의 첫인사, 첫 대화, 첫 웃음을 좀 더 자세하게 적어둘걸.
이제 와서, 내 기억에만 의지해 적는 이 첫 만남은,
가장 너의 색을 잃은, 빛바랜 형체다.
매일을 반복해 장면을 재생해 보아도, 닳고 닳은 필름처럼, 뿌연 잔상이 뚝뚝 끊겨버린다.
너는 나와 처음 만난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순간은, 네 기억 속에서 숨 쉬고 있을까.
짝사랑 상대와의 첫 만남은,
정말 지루하게도 별 것 없었다.
하지만 그 만남이
어쩐지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을 데려오더라니.
결국 겨울이 오겠다는 전조였음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