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직
우여곡절 많았던 1년의 휴직.
중증 우울증, 사직서 제출과 철회, 인사교류 시도, 이직 준비까지…
그리고 복직을 3주 앞두고, 나는 복직서를 냈다.
#쉬어가도 괜찮아
남들이 사회생활에서 한창 경력을 쌓을 시기에,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멈춰 섰다.
뒤처지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돌이켜보면 완전히 잃은 시간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내공을 쌓는 수련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소문이 빠른 조직이라 그런지, 어느 팀장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다.
내가 갈 만한 부서 두 곳을 알려주셨고,
복직 하루 전, 새로 발령받을 부서의 팀장님께 전화가 왔다.
그렇게 나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행히 시청이 아닌, 멀리 떨어진 작은 사업소로 발령이 났다.
부딪히는 사람의 수가 많이 줄었으니, 이 정도면 행운이다.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이제, 현실
미련 없이 버렸던 업무 수첩은 몇 달 후 총무과에 가서 빌다시피 하며 다시 받아왔고,
쇼퍼백은 그만한 가방을 찾지 못해 고생 끝에 다시 사게 되었다.
1년간 후줄근한 복장에 익숙해져 새 슬랙스를 사는 데도 애를 먹었다.
무엇보다 가장 아까운 건, 피 땀 눈물로 만들었던 나만의 업무 매뉴얼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더 탄탄하게.
#이번엔 인수인계도 받다
전임자분은 마침 휴직에 들어가셨지만, 하루 시간을 내 직접 인수인계를 해주셨다.
너무 감격해 기프티콘까지 보냈더니, 그분은 오히려 당황하셨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감사해하느냐"며.
내가 일전에 인수인계 없이 죽다 살아났던 경험을, 그분은 모르겠지.
#다시, 시작
1년의 휴직 기간 동안 내가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아니다.
부서가 바뀌었다고 환경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제 어떤 시련이 와도,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한 번쯤은 겪어본 일들이니까.
그리고, 이 조직에 대한 기대는 이제 없다.
바라는 게 없으니 어떤 일이 닥쳐도 덜 힘들다.
행정이라는 일은 단순히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의 조율, 실무가 잘 굴러가기 위한 시설 관리와 예산 집행,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기획,
때로는 부탁하며 고개를 숙여야 하고,
결과보고를 위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어디서든 사진 셔터를 눌러야 하며,
행사 담당자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기도 한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이제는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1년이란 근무 시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게다가 휴직 후 1년간 업무에 대해서 다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와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그동안 많은 걸 배운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일은 많다.
그래서 ‘모른다’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문서대장을 뒤지고,
때로는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물어보기도 한다.
이미 각오가 돼있는 상태여서 예전보다는 덜 힘들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사고가 나면 달려가고,
지방 행사를 위해 주말 근무를 나가고,
각종 평가를 앞두고 실적에 연연해야 한다.
윗사람에게 굽신굽신 거리며 비굴해야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안다.
모든 게 이 일의 일부라는 것을.
사기업과는 너무나 다른 조직 문화까지도,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 예전엔 실감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여전히 부딪히고 헤매지만, 예전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내 중심이 보인다.
달라진 건 많지 않지만, 달라진 나로 돌아왔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주어진 하루를 견디고, 버티고, 조금씩 나아가는 일.
그렇게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