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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Jan 18. 2022

명멸하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사랑했던 프로그램의 폐지 소식을 듣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랑도, 명예도, 생명도...

뜨겁게 불타오르던

활화산의 시기는

있을지언정


언젠간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지고, 묻히고,

사그라지고, 잊힌다.


하지만 그 소멸의 언덕에서

고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며

한때 세상의 인기를 사로잡았던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파노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서두가 길었다.

나는 짧지만 11년간 방송을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다.

 

지난 10년간

격동하는 방송 생태계를 몸소 겪으며

많은 프로그램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


그 안에서

너무 즐겁게 일했던 추억도

하기 싫어서 다 그만두고 싶었던

프로그램의 추억도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들은

모두 아름답고 단단하게

추억될 뿐이다.




최근,

한 프로그램의 소멸 소식이

들려왔다.


PD가 돼

처음으로 조연출이 돼

스크롤에 올렸던 프로그램.

내가 이 회사에

오고 싶게 만들었던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그리고 10년간

그렇게 지원해도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았던

마음속 사모하던 프로그램이다.


2011. 첫 조연출의 흔적


조연출 경험이 짧아

두 편 밖에 참여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지만.


PD라는 직군을 선택하길

참 잘했구나 생각했던

값진 초년생의 기억이다.


내가 사모했던

그 프로그램은 바로

"다큐멘터리 3일"이다.


Since 2007

횟수로 올해가 16년 차다.

한 프로그램이 16년간 쉬지 않고

지속됐다는 건

그 브랜드 가치가 대단하다는 걸

방증한다.


6시내고향도,

아침마당도,

가요무대도,

한결같이 사랑받고

시청자들의 안방을 사로잡는

장수의 비결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닳고 닳은 삶의 무게와도 같다.


다큐멘터리 3일 Since 2007


이 프로그램은 온전히

한 공간, 한 주제를

72시간 동안 담는다.


5~6명의 VJ들이

각각의 섹터를 담당하고,

그중 몇몇은 이미지 그림을

그중 몇몇은 스토리라인을 담당해

섭외하고 인터뷰한다.


짧은 경험상

보통 첫날은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고,

이야기의 중심이 될 인물들을 찾는다.

둘째 날은 발전된 시간의 풍경들.

셋째 날은 마음을 연 공간의 사람들.

보통 셋째 날이 되면

카메라가 어색했던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게 3일이라는

시간적 구성이 담아내는

묘약이다.


프로그램 포맷은

일본의 다큐멘터리 72시간을

구입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더 인기를 끌었고

주말 밤 개콘이 끝나면

아쉬움을 달래는

프로그램으로 장식됐다.


한국에서 72시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묘미는

시간에 따라 친근감을 갖는

한국인의 정서에 적격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2시간의 기록


다큐멘터리 3일은

각본 없는 현장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약간의 사전 취재는 있을지언정

어떤 답변도 강요하지 않는다.

듣는 그대로 방송에 나갈 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와 닮은 사람들,

우리와 같은 고민들,

우리와 같은 처지,

이런 공감대가

높은 시청률을 담보했고,

수많은 화제를 남겼다.


VJ의 카메라에는

방송의 지평이 담겼다.


대통령 후보자의

72시간의 기록부터

대통령 서거 후

봉하마을 72시간의 기록까지


분만실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순간부터

공무원의 꿈을 꾸며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는

고시촌 풍경까지


삶의 무게를 담아 오가는

고물상 서민들의 인생 이야기는

촬영하는 감독님의

눈물 맺힌 목소리까지 회자되며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기억하면

모든 게 참 좋았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더 아쉬운 미련이

남는지 모르겠다.


방송쟁이로 살면서

한 번쯤은 다시 가서

꼭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폐지 결정이

누구의 생각 속에서

어떤 집단의 탁상공론 속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공장의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어

씁쓸함만 남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로그램의 의미는 퇴색되기도 하고

제작 여건과 현장은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야

프로그램은 더 진정성을 갖고

브랜드 가치를 올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다림이 짧다.

잘 나가던 것들도

결과물에 따라

내팽개치는 것도 많이 봤다.


8부작 시즌제가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모르지만

프로그램을 만드는 초기 비용에

투자와 공이 많이 들어가는데 비해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소멸된다.


한 번쯤 기다려주면 안 될까.

그리고 그만큼 브랜드 가치가 남았다면

한 번쯤 재고해볼 생각은 없을까.


추적 60분,

체험 삶의 현장,

도전 골든벨,

가요 7089,

소비자고발...


쓰임을 다하고

사라져 간 많은 프로그램들이

여전히 유튜브에 회자되는 것처럼

지고지순한 사모곡을 담아

다큐 3일에 보내련다.


굿모닝,

굿 애프터눈,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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