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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환 Feb 05. 2023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구예요?

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에 이제 누구라고 대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렘 쿨하스, 피터줌터, 리처드마이어, SANAA, BIG, UN studio, mvrdv, 자하하디드..

르꼬르뷔지에, 미스반데로에 , 프랭크로이드라이트, 알바알토, 루이스칸..

이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가 있었던가.

거의 10년전부터 좋아했지만 이제는 안도 다다오라고 하면 저도요 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구마 겐고. くまけんご


이름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나는 서양식 이름으로 성과 이름이 바뀐 겐고쿠마 kengo kuma 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에 대해 특별히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잘 알지 못하는, 별 관심 없던 건축가였다.

내게는 그저 목조건축과 치도리 루버를 자주 쓰고 대표작이 스타벅스 인테리어인 건축가. 

글쎄 이야기 듣기로는 자연친화적인 건축을 하는 건축가정도로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구마겐고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구마겐고를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저는 구마겐고 좋아해요."


그녀는 건축에도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은 따로 없다고 했다.

그냥 남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에세이나 인터뷰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구마겐고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또 리움미술관에서 실제로 구마겐고를 보게 된 이후로 구마겐고가 좋아졌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구마겐고가 궁금해졌다. 사실 그보다 그녀가 구마겐고의 어떤 점을 좋다고 느꼈는 지 궁금해졌다.

다음날 무작정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봤지만 구마겐고에 대한 책은 없었다. 

급한대로 전자책에서 찾아보니 마침 이 책이 있었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구마겐고의 어린 시절 자신의 환경과 그런 환경들 속에서 그 당시 들었던 생각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현재 자신의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풀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별 관심이 없어 에세이를 즐겨 읽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했었지만, 내가 읽었던 건축에 대한 책들 중에는 에세이적 성격이 많기에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양의 에세이를 읽어와서 그런지 이런 글이 꽤나 재밌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구마겐고라는 사람은 옆집아저씨같이 생긴 이미지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굉장히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집에 미닫이문을 바꿀 때 문을 이루고 있는 프레임이 직사각형이 아닌 정사각형이어서 답답해보여 싫었다는 이야기, 옷보다는 신발이라는 것이 땅과 가장 가깝고 직접 맞닿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신발을 바꿔신을 때마다 땅을 대하는 느낌이 다르게 느껴져서 지금도 사람들을 처음 볼 때 가장 먼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를 가장 유심하게 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보다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어보인다. 그런 섬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매우 뚜렷하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르꼬르뷔지에와 미스반데로에를 지루한 건축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구마겐고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들이 르꼬르뷔지에를 동경하는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 건축의 르꼬르뷔지에, 철의 건축 미스가 양대 거장으로 등장하여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논쟁을 벌이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왜 지금 새삼스럽게 콘크리트나 철의 거장을 동경해야 하는 것일까 잔뜩 비꼬인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르꼬르뷔지에나 미스의 작품을 상세하게 분석해, 이런 비례가 좋다거나 이런 섬세함이 아름답다는 식으로 연구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도대체 왜 그런 연구를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율이 좋고 나쁨을 논하기 전에 공업화 사회라는 꿈 많은 시대의 챔피언이었던 그들은 내가 볼 때에는 지루한 건축가였다.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새삼 르꼬르뷔지에나 미스를 논하는 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형적인 건축의 르꼬르뷔지에나 비례와 넓고 투명한 공간의 건축을 했던 미스와는 다르게, 구마겐고의 건축은 작고 낮고 느리다.

하지만 그는 작은 것들을 모아 커다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투명하진 않지만 작은 틈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동굴을 만드는 건축을 추구한다. 그런 그의 건축적 성향은 그의 어린 시절 그가 느꼈던 감정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의 건축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의 건축은 완벽해 보이진 않아도 언제나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듯해 보인다.


그녀와 연인이 되고 나서는 그녀에게 구마겐고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직접 이야기해 준 적은 없다. 그녀가 도쿄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건물이라며 추천해주었던 르꼬르뷔지에의 서양미술관을 추천해주었다가 구마겐고가 르꼬르뷔지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책 내용을 읽고나서 다시 그녀가 좋아한다는 구마겐고의 건축물을 두어 곳을 추천해 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나와 만나기 전에 내가 좋게 읽었었다며 흘려 말했던 스토너라는 책을 기억했다가 도쿄여행 중에 가져와 틈틈이 읽고 있는데 이 책이 너무나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이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사실 나도 그녀가 구마겐고를 좋아한다 말하기에 그 이후로 그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고 말한 것이 그녀와 나눈 구마겐고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구마겐고의 겐고[けんご]는 ‘견고’하다는 뜻이 있다. 실제로 그의 이름이 견고하다의 견고를 한자로 쓰진 않지만, 그의 건축철학을 읽어보면 겐고라는 이름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가 구마겐고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그의 건축물들처럼 작고 낮고 느려보일지 몰라도, 그의 이름처럼 견고한 사람을, 또 그런 삶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그녀가 좋게 읽었다고 한 스토너란 책의 주인공 또한 화려하진 않지만 평생을 떳떳하고 견고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구마겐고요. 저는 구마겐고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해야겠다.



경계를 경계라고 인식하려면 경계의 양쪽을 모두 경험해봐야 한다. 경계를 넘어 이동하면서 이쪽에서 저쪽을, 또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경계를 경계로 느낄 수 없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나의 스킨으로 덮은 이유는 건물을 하나의 생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싱글스킨에는 생물이 가진 피부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하나의 피부가 배, 등처럼 각각의 부위에 주어진 다른 환경조건에 대응하면서 미묘한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싱글스킨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알몸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건축을 두뇌의 산물에서 해방시키고 싶다. 두뇌로 만든 건축은 논리가 지나치게 드러나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싱글 스킨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건축에 생물적인 대범함과 부드러운 유연성이 탄생한다.
커다란 벽 전체를 나무로 덮는다면 나무가 나무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확실히 나무이지만 멀리서 보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요철이 있는 질감이나 미묘한 색깔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치도리 패턴을 이용하자 재료비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나무의 질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치도리는 마법처럼 다양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나는 치도리의 효과를 치도리를 치도리답게 만드는 ‘틈새의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을 할 때 틈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건축을 구성하는 입자 사이의 틈새를 통하여 빛이나 바람이나 냄새가 들어온다. 틈새가 없으면 인간은 질식해 버린다. 루버는 내 건축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자주 거론되는데, 결국 틈새를 만들기 위한 자재다.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막대보다 틈새 쪽이 더 중요한 포인트다.
틈이라는 것은 단순히 건축 디자인과 관련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틈을 좀 더 넓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건축에서도 인생에서도 일본인은 지나칠 정도로 틈이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모두 깨닫는다. 인생에 유토피아 따위는 없다.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새로운 집’따위는 있을 수 없다. 상황에 맞추어 그날그날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가족은 이런 검소한 ‘반유토피아사상’으로 돌아가 조금씩 집을 증축해 나갔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증축하는 일을 좋아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증축과 관련된 설계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손도 많이 들어가 효율성 면에서는 최악이다. 대부분 적자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상황에 맞춘다’는 경험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내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증축적’이라는 것이며 ‘반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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