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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Jan 18. 2020

[제멋대로 영화보기 #7]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떠오르는 이미지로 영화보기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의 이야기이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떤 귀족 여사의 집으로 오게 된다. 그녀가 그려야 하는 대상은 여사의 딸 '엘로이즈(아델 에넬)'인데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앞둔 상태이다. 정략결혼의 상대방에게 보내줄 용도로 그리는 초상화이기에 엘로이즈는 '포즈를 취하기 어렵다'며 모습을 잘 비추지 않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마리안느의 목표는 화가가 아닌 척 접근해 엘로이즈와 가까워지며 몰래몰래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조금씩 가까워지던 둘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대체로 잔잔한 분위기로 흘러가고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답게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크게 튀는 것 없이 무난하다. 필자는 영화의 이야기 자체보단 그림, 바다, 벽난로, 축제, 자수(刺繡),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드레스의 색깔 대비, 미소 짓는 여인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처럼 이미지와 몇몇의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일단 기억나는 이미지 몇 가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먼저 그림은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림은 물감이 캔버스 위에 짓이겨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이고 완성된 그림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의 섬세한 스케치와 붓터치가 등장할 때마다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영화의 중반부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정체를 눈치채고 정식으로 자신을 그린 초상화를 본 후 이건 내가 아니라는 악평을 날리자, 자신이 고뇌하며 그린 그림을 과감히 지워버리는 마리안느의 모습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에서 이미지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 말고도 그림은 이 당시 사회상도 보여준다. 남성의 누드화는 여성이 그릴 수 없다는 대목과 영화 후반부에 마리안느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전시회를 개최하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귀족사회였던 프랑스가 여성들에게 어떤 사회였는지 알 수 있었다.   


 바다도 많이 생각난다. 참 이쁘고 푸른 바다였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 이면에 감춰진 바다의 의미는 씁쓸하고 무섭기도 했다. 바다는 탁 트이고 넓어서 포용력 있어 보인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론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이 무섭기도 하다. 엘로이즈의 입장에선 특히 더 그렇다. 원치 않는 정략결혼의 답답함을 잊고자 열심히 달려도 그 끝엔 절벽이, 밑엔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바다에 빙 둘러 싸인 섬처럼 보이는 엘로이즈의 집은 어쩐지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는 감옥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엘로이즈의 정략결혼 상대도 바다 건너 이탈리아에 있다. 엘로이즈가 자신을 둘러싼 바다를 벗어나는 건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고 정략결혼에 응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보기엔 참 아름답지만 지켜보는 우리 입장에선 씁쓸하고 엘로이즈 입장에선 무서울 수도 있는 바다다.


 벽난로와 축제는 앞서 언급한 그림이나 바다보단 출현 빈도수가 드물다. 벽난로는 엘로이즈 집안에서 촛불과 더불어 밤마다 항상 타오르고 있는데, 등장할 때마다 장작이 타오르는 시각적 혹 청각적 느낌이 다르게 느껴진다. 맨 처음 마리안느가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벽난로 앞에 벌거벗은 채 몸을 둥글게 만 이미지는 새로운 환경에 놓인 긴장감을 따뜻하게 녹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점차 후반부로 갈수록 타오르는 벽난로와 장작 타는 소리는 격양되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형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축제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전까진 서로 간 만 보던 두 여인이 느낌이 통하게 되는 순간이었고 그 둘 사이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모닥불의 불씨가 엘로이즈에게 어쩌다 옮겨가면서 비유적 표현이 아닌 실제로 타오르는 여인이 되기도 한 순간이었다.

 축제 장면은 또 잔잔한 영화가 감정적으로 격양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인데, 개인적으로 눈치가 없어서 그런지 좀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전까지 대충 기류가 흐르는 것 같기는 했는데 마치 걷잡을 수 없게 불이 붙어버린 것처럼 두 여인이 사랑하게 되어서 그 감정을 순간적으로 따라잡기가 좀 힘들었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두 여인에 대해선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 표정, 말투, 몸짓 모두가 잘 어울렸고 아름다웠다. 최근 <디어스킨>에서 본 '아델 에넬'은 가지고 있는 얼굴이 많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에미 멜랑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배우인데 영화 스토리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마스크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몇몇 기사를 보니 '엠마 왓슨'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좀 느낌은 있는데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이야기할 때 이 두 배우의 호연을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하녀인 '소피'가 낙태하는 장면도 이미지가 강렬했다. 제대로 된 병원도 없어 허름한 산파의 집 같은 곳에서 낙태를 하는데 소피가 낙태를 위해 누운 공간엔 산파가 키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기들 누워있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없애는 순간의 고통을 바로 옆에 있는 산파의 아기의 손을 잡으면서 견뎌내는 장면이 역설적이면서도 슬픈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소피가 아이를 가지게 만든 남자는 끝까지 알 수 없으며 영화 속에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영화 자체에 중요한 남자 인물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단역도 매우 적게 출연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남녀의 성비가 맞아야 한다거나 특정 성별이 꼭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각각의 시나리오와 연출의 의도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한 인물이 들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선 중요한 남자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있었다면 사족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미지 말고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가 셋이 친해진 후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하던 게 기억이 난다. 리라 연주가 뛰어난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어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읽으면서도 매우 슬펐었다.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지옥에 뛰어들고 감동적인 연주로 페르세포네의 마음까지 돌렸지만, 지옥을 나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조건을 마지막에 지키지 못해 다시 아내를 잃고 마는 이야기이다. 사실 필자는 이 이야기도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도 그렇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 돌아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딱 일정 거리만 참으면 되는 건데 그 간단한 것을 왜 못할까? 영화 속에서 소피도 필자와 비슷한 소견을 내세운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이해했고 그런 그를 용서한 아내도 이해했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행위 자체가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에 걱정되는 마음에서 한 것이기에 그 자체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정한 지옥의 규칙이 문제인 것이다. 아마 정략결혼과 동성의 사랑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힘든 사랑을 시작하게 된 마리안느라 더 오르페우스의 행위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의 결말, 오페라 극장으로 추청 되는 곳에서 마리안느는 우연히 엘로이즈와 재회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극에만 집중한다. 웅장한 오페라를 들으며 눈물을 쏟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카메라가 오래도록 잡아준다. 그가 보았던 극은 어떤 내용이었고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떤 내막을 담고 있는 음악이었을까? 영화가 알려주지 않아 답은 모르지만 많은 감정이 섞인 엘로이즈의 표정은 여운이 짙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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