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유현 Feb 15. 2020

[제멋대로 영화보기 #8] 행복한 라짜로

순수선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라짜로>는 소작 행위가 금지된 시대에 아직도 소작농으로 후작 부인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들은 현대판 노예처럼 임금도 받지 않고 후작부인의 담배농장 일을 도맡아 한다. 그리고 통신을 비롯한 문명과 단절되어 있기에 이런 삶 자체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는다. 라짜로는 소작농들한테도 무시받으며 온갖 궂은일을 다 담당하고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만 받는 노예 밑의 존재이다. 그러던 어느 날 후작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가 인비올라타에 방문한다. 탄크레디는 이곳에서 행해지는 비인격적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마을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인 라짜로랑 친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탄크레디는 라짜로를 끌어들여 자작 납치극을 벌이게 되는데 이 납치극은 마을에 예상치 못한 전개를 안겨주게 된다.

 


 제목은 행복한 라짜로이지만, 필자는 라짜로가 정말 행복한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시종일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반짝하게 뜨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라짜로가 처한 상황은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가족이라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뿐이다. 같은 소작농의 처지이지만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일에는 어김없이 라짜로를 부른다. 그럼에도 라짜로는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를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항상 행복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랬다기보단 보통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라짜로에게 처음으로 귀족 출신인 탄그레디가 인간적으로 다가와준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라짜로가 오히려 신분 자체가 다른 사람과 친해진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탄그레디가 순수한 영혼의 라짜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라짜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탄그레디를 대한 것인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라짜로 캐릭터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을 절대적 '선'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순수한 선 자체인 모습이다 보니 오히려 의중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순수악보다 순수선이 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짜로가 정말 행복한 건지 아니면 다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함부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러닝타임의 거의 절반쯤 되는 시기에 큰 영화적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열병을 앓던 라짜로가 아픈 와중에도 탄그레디를 만나러 가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높이에서 떨어진 라짜로지만 그는 거짓말처럼 살아난다. 그런데 그가 살아난 건 떨어진 그 즉시가 아니라 몇십 년 정도 되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시 살아난 라짜로는 모든 게 변한 세상 속에서 외관과 성품 모두 그대로이다. 여전히 탄그레디를 찾아다니는 라짜로의 여정을 함께하며 우리는 인비올라타 사람들의 변한 모습도 함께 보게 된다.

 인비올라타 사람들의 변한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라자로가 절벽에서 떨어진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같은 시각 탄그레디의 자작 납치극 때문에 방문한 경찰로 인해 후작부인의 소작 행위가 희대의 사기극으로 세간에 알려지면서 인비올라타 사람들과 탄그레디의 가족의 삶은 모두 180도 달라졌다. 후작부인은 전재산을 은행에 몰수당하고 말 그대로 폭삭 망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영화가 정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임금도 못 받고 소작 생활하던 마을 사람들은 자유를 얻고 멋진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살아난 라짜로가 만난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사기로 판명된 소작 생활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들의 장점인 농경&채집을 모두 멀리하게 되면서 할 일이 마땅히 없어진 그들은 도둑질과 사기 행위로 연명한다. 이는 사회에서 약자를 보호해줄 때 단순히 손만 잡고 일으켜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준다. 오랫동안 앉아있어 제대로 설 다리 힘도 없는 사람을 일으켜 주기만 하면 금세 다시 주저앉는다. 한번 일으켜 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똑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라짜로라는 이름은 성서의 '나사로'와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라자로는 성인(人)과 흡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가 열병을 앓다 죽고 부활하는 과정도 성서에서 따왔을 듯하다. 하지만 성인으로서 라짜로는 이 영화에선 성당의 찬양 멜로디가 라짜로를 따라 맴돈 것을 제외하곤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그의 씁쓸한 최후마저도 성인으로서의 위대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친구인 탄크레디의 재산을 찾아주기 위해 찾아간 은행에서 오해가 불러온 폭력으로 인해 희생된다. 라짜로는 순수선이고 성인과 흡사한 모습이 었지만 사회와 어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가끔 성서를 보며 성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오래전 과학도 기술도 발전하지 못한 사회였기 때문에 무지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라짜로를 보면서 과학과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한 요즘 사회에서도 성인을 알아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전의 정도와 상관없이 세상엔 순수선이 존재하기 않기에 예나 지금이나 순수선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선 늑대가 중요한 상징처럼 등장한다. 로마 건국신화에 따르면 초대 황제 로물루스가 늑대에게 키워졌고 이 때문에 늑대는 이탈리아의 국수(國獸)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야생 늑대는 맹수이다. 보통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늑대와 라짜로는 늑대울음소리로 교감한다. 그리고 라짜로가 죽어있을 때 그를 발견한 늑대는 라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영화에 따르면 난생 맡아본 적 없는 선한 냄새 때문에 그랬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라짜로를 한층 더 성인의 모습처럼 보이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라짜로의 최후의 순간에도 늑대는 지척에 있다. 이를 통해 필자는 늑대가 성인 라짜로의 현신이거나, 그의 곁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다.   


     평등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많이 쓰이고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평등이 일어날 수가 없다. 명시된 계급이 없을 뿐 계급과 그에 따른 계층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씁쓸한 사회 현실 속에서 순수선이자 성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라짜로는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의 유일한 친구 탄그레디마저도 구원하지 못했다. 대놓고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쓴 맛이 강한 영화였다.

이전 07화 [제멋대로 영화보기 #7]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