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소재는 고대 연극과 중세 문학, 현대 영화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대중에게 사랑받고 사용되어왔다. 로맨스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이 이런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답이 딱 떨어지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로맨스를 하나의 장르로 정의하는 것 역시 두루뭉술하고 넓은 범주로 단순화하는 느낌이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는 넓게 보면 당연히 로맨스 장르에 속한다. 하지만 흔히 떠올릴 법한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이는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이 남녀 간의 익숙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객들에게 영화에서 나타나는 이 관계성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듯한 영화다.
<팬텀 스레드>는 영국 왕실과 사교계를 위한 드레스를 만들 정도로 최고의 디자이너인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과 젊고 당찬 ‘알마(빅키 크리엡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레이놀즈는 옷을 만들 때만큼은 정말 진지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일을 제외한 그의 삶을 보면 결핍이 존재한다. 특히 죽은 엄마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으로 그려진다. 레이놀즈는 종종 엄마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이 만든 옷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엄마는 그가 가장 힘겨워할 때 환영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애착을 두고 있는 엄마의 커다란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레이놀즈의 누나인 ‘시릴 우드콕(레슬리 맨빌)’이다. 시릴과 레이놀즈는 둘 다 늦은 나이까지 결혼도 안 하고 서로에게 의지한 상태로 오래 함께해왔다. 불안정한 관계는 레이놀즈를 상당히 강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일할 때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상당히 예민하고 확고한 취향을 고집하며 옷감 안에 간직하고 싶은 문구를 적어 숨겨 놓는 자신만의 강박 습관을 가지고 있다.
알마를 처음 봤을 때 레이놀즈가 한눈에 그녀에게 반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일적으로 영감을 주는 좋은 몸매를 지닌 그녀를 뮤즈처럼 기능적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반면 알마는 나이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멋있고 자신이 맡은 일에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이놀즈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시릴과 레이놀즈의 규격화된 일상에 알마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영감을 위한 뮤즈일 때는 레이놀즈가 알마를 사랑스럽게 봐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알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알마는 레이놀즈가 강박적인 일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래서 알마는 그를 일에서 분리하기 위해 독버섯을 이용한다.
<팬텀 스레드>에서 독버섯은 상당히 중요한 상징이다. 그리고 이 독버섯으로 인해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독버섯을 먹은 레이놀즈는 앓아누우며 자연스럽게 일에서 멀어졌고 알마는 그런 레이놀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이때 레이놀즈는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전에는 애착 관계를 옷에 투영하고 집착했는데 간호하는 알마의 모습에 그 애착 관계가 전이된 것이다. 레이놀즈가 아플 때 죽은 엄마의 환영을 보게 된다는 것도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팬텀 스레드(직역하면 유령 실)’라고 할 수 있는 ‘옷(의상)’이라는 애착 관계의 망령이 알마에게 향하게 된 것이다. 병에서 회복한 레이놀즈는 그간 생각도 안 해본 결혼 제의를 알마에게 먼저 할 정도로 간호하는 알마에게 빠지게 된다.
결혼 후 몸 상태를 회복한 레이놀즈는 다시 습관처럼 옷에 매달린다. 그리고 전처럼 옷에게 관심이 향하는 만큼 알마에게서는 멀어진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예전처럼 옷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의 망령은 이제 옷이 아닌 ‘간호하는’ 알마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알마 또한 레이놀즈가 아팠을 때처럼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바라고 있다. 다만 죽을 정도로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아팠다가 다시 강해졌다가 다시 아프길 원한다. 이해관계 측면에서 레이놀즈가 아파야 한다는 점이 일치하게 됐다. 그래서 결말에 레이놀즈는 알마가 해준 음식에 독버섯이 들어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응시하며 꾸역꾸역 버섯을 씹는다. 그가 독버섯을 씹는 행위는 흔히 ‘아파야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랑의 역설을 상징한다.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누군가를 다시 깊게 사랑하게 된다.
이제 ‘레이놀즈와 알마의 이런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라는 서두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상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다소 병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둘의 관계는 확실히 사랑이 맞다. 더 나아가 멋들어진 의상과 세트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깊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파괴적으로 그릴 수 있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칫하면 평범하고 통속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 이야기인데 전혀 그런 태가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장르를 나름대로 규정해보고 싶다. 독버섯의 잔향이 짙게 남았다는 점에서 ‘지독한 로맨스’ 장르 영화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