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응급실. 사람들의 가장 거친 민낯이 드러나는 이곳에서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사람들은 푸른 초원과 평화로운 양 떼를 상상하지만, 이곳은 그 평화의 뒷면, 삶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욕설이 가득한 곳이다. 밤낮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불안에 떨며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가족들의 축축한 손바닥. 나는 그 모든 삶의 조각들을 꿰어 맞추는 일을 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환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며 함께 울었고, 한 명이라도 더 돕고 싶은 마음에 점심시간도 잊었다. 팀장이 쉬어가라 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야. 나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어.’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으니, 이렇게 몰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삶에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나를 춤추게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우리 '성과 사회'가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철학자 한병철이 그의 저서 『피로 사회』에서 말했듯, 나는 더 이상 외부의 규율이 아닌 나 스스로가 나를 감시하고 착취하는 '성과 주체'가 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긍정성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말이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고 말았다. 나는 환자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환자가 눈물을 흘리면 함께 울었고, 그들의 절망에 나의 감정은 여과 없이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더 많은 환자를, 더 좋은 방법으로 돕고 싶다는 욕망을 멈추지 않았다.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내 마음을 조종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가장 가혹하게 대하는 주인이 되어버렸다. 몸이 지쳐도 '조금만 더', 마음이 아파도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며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결국 번아웃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번아웃을 향해 달려갔다.
어쩌다 번아웃이 아니라, 어쩐지 번아웃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