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형, 진짜 실망스러워요. 뉴질랜드로 오면, 푸른 잔디밭이 깔린 집에서 살 거라 생각했어요.”
어느 날 한인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배가 축 처진 어깨로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순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피식' 웃음이 터졌다. 후배의 하소연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뉴질랜드 환상이 산산이 부서진 후배를 보니 오래전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아니, 이심전이(以心轉移)에 더 가까웠다. 후배의 마음이 고스란히 흘러들어 왔다고 해야 할까...
한때 한국 방송에서는 뉴질랜드 체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MBN 예능 프로그램 '떴다! 캡틴 킴''은 김병만이 직접 조종하는 4인승 경비행기 '카스나 172 스카이훅'을 타고 출연진과 뉴질랜드 곳곳을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방송 화면 가득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잃고 보느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햇살에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초록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드넓게 펼쳐진 농장이 어우러진 모티티 섬(Motiti Island).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한없이 평화로운 타우랑가(Tauranga). 하늘의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 타우포(Taupo). 그 모든 풍경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와,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어?”
지금 사는 크라이스트처치도 방송 속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자연에 고개를 숙이고, 자연은 도시를 품에 안은 듯했다. 바람과 햇살,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낭만으로 가득한 정원 도시. “이 꿈의 도시에서 내가 살고 있다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민의 삶은 높은 상공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한가로운 유람이 아니었다. 찰리 채플린이 “삶은 멀리에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듯이, 이민의 삶은 멀찍이 롱샷으로 바라봐야만 그나마 희극이 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 모두 그런 것 같다.
아내와 함께 꿈의 씨앗을 심은 이 도시에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연봉 1억의 사회복지사가 된 지금의 나를 보며 ‘참 행복한 인생’이라 말한다. 하지만 삶의 단면을 잘게 쪼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빛나는 오늘 뒤에는 어제의 고통과 눈물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이민을 결정했을 당시, 뉴질랜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어서 손쉽게 원하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서,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준비해서 올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거의 '문맹인'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올 때쯤이면 따뜻한 봄이야!"라는 친구의 말만 덜컥 믿고 봄, 여름옷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배로 부쳤다.
뉴질랜드는 하루에도 날씨가 시시각각 변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날밤, 거실과 방 하나뿐인 집을 두 시간 넘게 뒤져 보일러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집을 데울 만한 난방 기구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드럼통(물탱크)만이 벽장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서로의 체온이라도 나누려는 듯, 온몸을 밀착한 채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밤새 덜덜 떨며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채 겨우 눈을 붙였다.
하지만 단지 날씨와 생활환경에만 무지했던 게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였던 우리는 경제관념이 부족했다. 워낙, '돈' 이야기는 곧 속물적인 욕심으로 치부되곤 하는 교회 문화 속에서 자랐기에, 한 달 월급이 얼마인지 알지도 모른 채 뉴질랜드로 왔다. 이는 고용했던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교회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사례비(월급) 추후 목사님과 협의’, 교회 구인 광고에 흔히 붙는 문구였다.
“세금 후에 한 달에 $1,700 달러입니다.”
첫 출근 날, 교회 재정을 맡은 집사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으로 급히 환율을 계산했다.
“자기야, 이거 한국 돈으로 한 백이십만 원 정도 되는 거 아냐?”
“우와, 진짜?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
“대박, 이 정도면 감사하고 살아야지!”
마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처럼 들떴다. 결혼 자금을 모으려고 결혼 직전까지 9개월 동안 보험회사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했다. 그때 받은 월급이 대략 90만 원 정도였으니, 그보다 더 바라는 건 '욕심'으로 똘똘 뭉친 속물이라고 스스로를 단정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른 채,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이 정도면, 우리 둘이 충분히 살 수 있어."
조금만 허리띠를 졸라매면 빚도 지지 않고, 양가 부모님께 손도 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중, 1월의 따뜻한 온기를 받아서인지, 우리의 사랑이 뜨거워져서인지, 이민 온 지 3개월 만에, 아내가 덜컥 임신해 버렸다.
"축하해!"
입덧으로 몸에 기운이라곤 한 줌도 남지 않은 듯 지쳐 쓰러진 아내에게 장미꽃이 한가득인 꽃다발을 건넸다. 하늘이 준 선물이라 생각해 태명도 ‘하늘이’라고 지으며, 우리에게 찾아온 새로운 생명을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아 차가운 현실의 서리로 뒤덮였다. 돈이 없으면 기쁜 일도 때때로 근심이 된다. 좋은 소식마저 온전히 기뻐하고 축하할 수 없는 것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이들의 비애였다.
출산을 앞둔 시점, 아내와 새로 태어날 아기가 조금이라도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원해, 큰마음을 먹고 이사를 했다. 새로 옮긴 집의 렌트비는 주당 $250. 월급의 절반 이상이 매달 렌트비로 빠져나갔다. 남은 돈마저도 전화비, 인터넷비, 주유비와 십일조, 주일 헌금까지 빼고 나면, 우리 세 가족이 버텨야 할 돈은 겨우 200달러뿐이었다.
남들 한 주 식비로 우리는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끼니마다 냉장고 속 남은 재료를 쥐어짜듯 꺼내 밥상을 차렸고, 하루하루가 고단한 행군이었다. 특히나 뉴질랜드에서는 일반적으로 주급 혹은 2주에 한 번씩 급여를 받는데, 나는 월급으로 받아서 5주가 있는 달은 우리의 허리띠를 더욱 단단히 조여야 했다.
장을 볼 때마다 아내는 꼼꼼히 가격표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재료를 찾아 헤맸고, 세일 상품이 아니면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다. "왜 이렇게 비싸?"라는 말이 습관처럼 터져 나왔다. 또 식사 중 임신한 아내가 "돼지 곱창이 먹고 싶다"라고 툭 내뱉었을 때,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숟가락만 들었다. 구할 수 없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설령 구할 수 있었더라도 사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먹고 싶은 음식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달래는 아내를 보며, 매일 밤 가슴을 찌르듯 아파했다.
비록 전에 살던 집보다 낫다고는 했지만, 이 집 역시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겨울밤이면 외풍이 심해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올 정도였다. 그뿐인가? 습기 찬 벽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사를 축하하기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간단히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며 목사님은 조용히 한마디를 툭 던지셨다.
"에휴, 그래도 카펫은 좀 너무했네."
곰팡이가 피어 얼룩진 낡은 카펫은 닳고 닳아 본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목사님께서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마음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한마디가 참 쓰리게 아팠다. 마치 비수가 되어 날아와 심장을 찌른 듯했다. 가난은 왜 이리 자존심을 갉아먹는 쓰리고 아픈 순간들을 만들어내는지. 그렇게 생긴 가슴속 멍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짙은 얼룩으로 남았다.
하지만, 돈은 없었을 지언정 마음마저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마음 부자로 살고 싶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려고 했다. 그 다짐 덕분이었을까, 사소한 것들 속에서 매일 행복을 발견했다.
비싼 놀이공원이나 화려한 장난감은 없었지만, '엘' 남매는 마트에서 받은 빈 상자 하나를 가지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들은 그 상자를 조종석 삼아 우주선 조종사가 되었고, 종이컵을 통신 장비라며 귀에 댔다. “아빠, 저희 이제 출발해요!” 상자 안에 쪼그려 앉아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며, 상자 밖에서 우주선이 발사되는 소리를 흉내 내주었다. 우리의 여행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 머나먼 하늘 상공을 날며 온 우주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낡은 상자는 때론 튼튼한 자동차가 되어 집안 곳곳을 누비는 레이싱카가 되기도 했고, 아내가 재단하고 풀로 붙여 만든 멋진 집 모양 상자 안에서 아이들은 서로에게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했다.
가난은 돈을 주지 않았지만, 상상력과 함께하는 즐거움까지 막지는 못했다. 비싼 수영장 대신 집 뒷마당에 만 원짜리 비닐 수영장을 펼쳤다. 차가운 수돗물을 채우고 튜브에 바람을 넣는 짧은 시간조차 아이들의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햇볕 아래 첨벙거리며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여름날의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이었다.
그때는 분명 가난했다. 하지만 낡은 상자 속 우주선이 때론 진짜 우주선보다 더 넓은 우주를 보여주었듯, 그때의 가난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돈이 없었기에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무엇보다, 덕분에 나는 이제 연봉 1억의 사회복지사로서, 환자의 손을 잡을 때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고생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덕분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 힘든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