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무언가에 홀린 듯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잿빛 흙탕물이었다. 땅속에서 솟아난 흙탕물은 시멘트와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비릿한 악취를 풍겼고, 축축하고 끈적한 질감이 다리를 휘감으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다리는 얼음물에 잠긴 듯 시리고 차가웠지만, 아이의 안위를 향한 절규가 폐를 더 뜨겁게 태웠다. 오직 그 방향만을 향해, 진흙 위를 허우적거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릿속은 오직 세상에 나온 지 3년, 첫 유치원 등교일의 아들 생각뿐이었다. 이 거대한 지진이 그 작은 세상을 어떻게 흔들어 놓았을까. 혹여나 그 여린 몸이 날카로운 파편에 베이진 않았을까. 작은 가슴으로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지는 않을까. 절박함에 심장이 갈가리 뜯겨 나가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몇 시간 전 시작되었다. 평화롭던 폴리텍 강의실이었다. 나는 서른넷. 결코 이르지 않은 나이에, 영어 정복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첫날이었다. 오랜 꿈을 향한 간절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불행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오후 12시 15분.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우레와 같았다. 건물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땅속에서 솟아난 살아있는 거대한 괴물처럼. 천장의 형광등은 종잇장처럼 휘청이며 곧 떨어질 듯했고, 유리창이 산산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몸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고, 목구멍에선 억눌린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붙든 채, 그저 이 모든 지옥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 순간, 눈에 아내가 사 온 소중한 아이포드가 들어왔다. 미끄러운 책상 가장자리를 따라 불안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작은 플라스틱 덩어리를 붙들었다. '고작 이 작은 MP3 하나에 목숨을 거는구나.' 피식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웃음은 흔들리는 삶을 꽉 부여잡기 위한 처절한 애착을 보여주는 영혼의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단단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이 만들어낸 울림. 그 울림은 지진의 굉음과 함께 커져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앞의 광경은 거대한 폭격처럼 처참했다. 도시는 문자 그대로 붕괴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희망 대신 찾아온 것은 차가운 기계음이었다. '뚜-뚜-뚜.' 익숙한 연결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주변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소리치거나, 얼어붙은 화면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간절히 확인한 메시지 창에도 응답은 없었다.
심장이 지하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귀에 들리는 무응답은 단순한 통신 장애가 아니었다. 삶의 가장 중요한 끈이 '툭' 끊겨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절망감이었다. 마치 연결이 끊긴 전화처럼 내 삶의 궤적 역시 덩달아 막히고 멈추는 듯했다.
살던 렌트집은 천장에서 물이 새고, 벽이 갈라져 위험해졌다. 집주인은 살 수 없으니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고 통보했다. 낯선 땅에 겨우 뿌리내리려던 이민자 가족의 보금자리가, 지진의 잔해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짐을 강제로 나와야 했다. 보금자리는 우리 가족을 뱉어냈다. 단단히 딛고 선 줄 알았던 뉴질랜드의 땅. 도시의 잔해와 함께 우리를 거부했다. 가슴에 품은 절망보다 더 차가운 떠돌이 신세. 우리는 도시의 폐허 위에 홀로 내던져졌다.
단 한순간에 모든 일상이 허물어졌다. 우리는 절망의 한가운데 던져졌다. 집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렌트집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그 이상.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모든 문턱이 유리처럼 차갑게 닫혔다. 렌트집을 구하기 위한 사투는 생존을 건 전쟁 그 자체였다. 품에 안은 아이의 무게. 한없이 소중했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을 거절하는 세상의 짐처럼 목을 죄어 왔다. 작은 손을 잡고 돌아서야 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랑하는 아이에게 이 험난한 세상에 발을 디디게 한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보금자리가 찢겨 나가자, 좌절의 악몽은 다음 수순을 밟았다. 길 위에 던져진 신세가 되자, 삶의 근간인 생계마저 정지해 버렸다. 운명은 잔인했다. 지진이 휩쓴 폐허 위에서, 삶은 또 한 번의 거대한 해일과 마주했다.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것은 '실업'이라는 이름의 싸늘한 그림자였다. 낯선 땅에서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무색하게, 돌아온 것은 보상이 아닌 쓰디쓴 상실이었다.
무너지는 도시는 사람들을 뱉어냈다. 도시를 떠나는 물결 속에, 사랑했던 교회의 재정 역시 벼랑 끝에 몰렸다. 결국 무거운 짐을 나누기 위해 교회를 위해 스스로 사임해야 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실업자라는 차가운 이름. 유일한 수입원이 사라지던 날, 마음속의 희망의 조각들까지 한 줌의 재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은 자존심을 꺾었다. 난생처음 실업 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복지부인 '워크 앤 인컴(Work and Income)' 사무실을 찾아갔다. 낯선 땅의 정부가 이방인의 '생존'을 심사하는 차가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마치 죄인이 된 듯 고개를 숙였다. 낯선 서류 뭉치 앞에서 나의 지난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서, 내가 세상에 기여하던 가치가 무너지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이민자로 겪는 고립감과 실업이 가져온 무력감이 복합적으로 짓눌렀다. 정들었던 사람들의 얼굴, 사랑했던 교회의 익숙한 풍경에 애틋한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잔인하게 찢겨 나간 삶의 한 페이지였다.
삶의 경로가 정지된 듯했지만, 유일하게 남은 희망의 끈은 영어 공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트라우마와 공포 속에 매일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그 해 1년 동안 무려 20,000번의 여진이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밤에도 땅이 끓는 듯했고, 멈추지 않는 진동은 마치 거대한 고문과 같았다. 도시는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이것은 숨 쉴 틈 없는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학교 강의실에서 건물이 조금만 흔들려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심장이 귀청이 찢어지게 두근거렸고, 학생들 모두 본능적으로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긴 채 진동이 멎기를 기다려야 했다. 집에서는 더욱 처절했다. 온 가족(아내, 세 살 아들, 한 살 딸)이 여진의 낮은 굉음을 들을 때마다, 차가운 땀을 흘리며 더블 사이즈 침대의 매트리스를 뒤집어쓰고 벌벌 떨기를 반복했다. 흙먼지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 속에서, 네 명의 호흡만이 불안하게 울렸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영어 공부마저, 이 끝없는 트라우마와 공포 속에서 매일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삶의 경로가 완전히 막힌 줄 알았던 그때, 그 '먹통'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따뜻한 기적이 있었다. 가장 단단한 사람의 끈들이, 멈췄던 삶을 다시 이어 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교회의 한 성도 분 덕분에 방 한 칸에 네 명이 살 수 있었다. 더블 사이즈 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 아내와 아이 둘은 침대 위에서, 나는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잤다. 그 방은 비록 초라했지만, 무너진 도시 속에서 우리 가족이 다시 설 수 있도록 허락된 최초의 안식처였다.
그 안식처 속에서, 나는 멈춰버린 삶의 경로를 다시 뚫어내야 한다고 절실하게 다짐했다. 지금 당장, 이 먹통 상태를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은 바로 영어 공부였다. 임시 거처의 좁은 공간, 남의 눈치 속에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혹여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 이불로 스탠드의 불빛을 가린 채 책을 펼쳤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얇고 바삭한 소리마저도 크게 울렸다. 모든 것이 파편처럼 흩어진 세상이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만큼은 가장으로서 삶의 형태를 굳건히 붙들고 싶었다.
나를 붙든 것은 가족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 지독한 시련 속에서도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들과 딸은 도시의 흙먼지와 절망 속에서도 매일 아침의 해처럼 빛났다. 그들의 작은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갈 때마다,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듯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무너진 도시에 울려 퍼지던 참혹한 굉음을 잠재우는 가장 단단한 위로였다. 소중한 하루하루를 함께 채워나가는 가족의 모습은 그 흔들림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의 작은 세계였다.
계속해서 좌절할 만한 순간에 놓였다. 자주 쓰러졌다. 넘어지는 것은 삶의 당연한 일부였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철저한 의지였다. 무너질 때마다 눈을 들었다. 절망의 바닥에 흩어져 있는 생존의 파편들을 악착같이 긁어모았다. 때로는 어둠 속에서 비추는 손전등처럼 방 한 칸에서 숨죽여 펼쳤던 영어책이 다음 날을 약속했다. 때로는 숨구멍처럼 열린 작은 일할 기회가 무너지려는 가장의 무게를 잠시 지탱했다. 때로는 희미한 희망을 속삭이는 누군가의 격려 한 마디가 꺼져가는 심지에 불꽃을 다시 붙여주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냈다.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내 영혼의 가장 단단한 뿌리를 발견하고 붙들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불행 그 자체가 아니었다.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멈춰 서고 만다. 하지만 그 먹통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시선이,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나는 안다. 아무리 당신의 삶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와 모든 경로가 '먹통'이 되어 멈춘 듯해도, 당신의 삶은 반드시 다시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시련과 난관이 당신을 덮쳐도, 당신은 반드시 가장 단단한 곳에 뿌리내리고 설 것이다. 나처럼, 당신 또한 그 지독했던 흔들림의 시간 속에서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닥친 그 시간은 당신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가장 단단한 뿌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