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억을 받는 사회복지사라고?"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는 거야?" "그 정도 연봉이면, 원어민 수준이겠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른한 살 늦은 나이에 뉴질랜드로 이민 왔을 때, 영어는 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아니, 나는 심각한 '영어 울렁증' 환자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영어는 바닥이었다. 영어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마다,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온몸을 떨었다. 당시 선생님들은 저마다 독특한 별명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영어 선생님의 별명은 피바다였다.
선생님은 성문법 문제들을 칠판에 한가득 채우고는 "오늘이 며칠이지?"라고 묻고는 했다. "4일이요!" 학생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그래?, 그러면 4번, 8번, 12번..." 다행히 내 번호는 15번이었다, "휴, 오늘은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쿠궁 쾅쾅"하는 날벼락 소리가 들렸다. "15번, 나와서 문제 풀어".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아, 오늘 또 죽었네" 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칠판으로 향하는 내 발은 쇠덩이처럼 무거웠다. 칠판 앞에 다다랐을 때, 내 앞에 검은 칠판에 흰 글씨만 보일 뿐이었다. 풀어야 할 문제를 보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이 깜깜해졌다. 분필을 집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못 풀겠어? 그럼 이리 와, 엎드려뻗쳐" 교탁에 두 손을 대고 엎드려뻗치자, 즉시 엉덩이에 '빠따'가 내린다. '퍽! 퍽! 퍽!' 엉덩이는 시큰거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 이상 창피해지지 않은 마음에,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제를 이해 못 하는 학생에게 체벌을 했던 그때를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닌데, 모르면 죄인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에게 큰 관심을 두고, 도움을 줬다면, 나와 같은 영어 울렁증 환자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엉덩이에 '빠따'가 내리쳐질 때마다,
영어 울렁증은 더욱 심해졌고, 자존감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2006년 9월, 결혼한지 2주 만에 아내와 함께 갑작스럽게 이민을 왔다. 영어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겪는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악몽은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세관대를 통과하는데, 세관원이 "@$@#ㅃ$%@@"라고 물었다. 내게는 그저 외계어처럼 들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입은 마치 자물쇠로 잠긴 듯 굳게 닫혔다. 지금이야 오가는 한국인이 많아, 백마 탄 왕자가 "짠"하고 나타나 도움을 주겠지만, 그때는 없었다. 아내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한 끝에, 간신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 후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아파 응급실에 갈 때가 가장 난감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어서 손쉽게 원하는 표현을 검색하거나 통역기를 쓸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럭셔리'한 것들이 없었다. 처음에는 영어를 잘하는 청년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마저더 몇 번 부탁하니, 더 이상 부탁할 엄두를 못냈다.
결국 아내와 나는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자고 했다. "My baby, sick, 콜록콜록." 온갖 제스처를 하며. 아이가 어디가 아픈지를 표현했다. 어떻게든 소통해야 했기에, 우리는 어리석은 어릿광대가 되었다.
이민 7년 차쯤, 더는 "No English"만 반복하며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정식으로 영어 과정을 밟았다. 이후 피땀 흘려 3년 동안 사회복지 학사 과정을 마쳤다. 이제 내 앞에 장밋빛 미래가 무지개처럼 펼쳐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금방 산산조각이 났다. 여전히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놈의 영어가 문제야!'라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일을 구하려고 구인 광고를 볼 때마다 '탁월한 의사소통 및 작문 능력 필수'라는 문구는 내 자신감을 땅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이력서를 쓰다가도 이내 포기하기 일쑤였다. 행여 이력서를 넣었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 "하.... 내 영어 때문이야"라고 영어 탓을 했다.
한 번은 운 좋게 면접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때때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고, 정확한 표현을 몰라 답을 하지 못했다. "Do you understand what I am saying?" 면접관이 짜증 난 듯이 묻는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온몸은 돌덩이처럼 굳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손끝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제발 땅 속으로 숨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창피함에 눈물 핑 돌 지경이었다.
"Yes, I understand"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질문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부족한 영어를 손등의 화상자국인 듯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다. 그러자 면접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너는 아직 사회복지사가 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라는 말로 내게 깊은 상처를 줬다.
그 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는 나만의 동굴 속에 갇혀 스스로를 끝없이 탓하며 지냈다. "왜 쓸데없이 사회복지를 공부해 가지고는... 차라리 영어가 필요 없는 일을 했으면 돈도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어느 날, 내 멘토인 교수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참을 듣고 있던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영어를 기준으로 사람을 뽑으면, 이민자를 아무도 뽑지 않겠지. 영어가 기준이었다면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거야."
그 순간, 교수님의 말은 눈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천을 걷어내는 칼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영어가 부족하다는 단점 하나가 나의 수많은 장점과 가능성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내 탁월한 공감 능력, 진정성, 근면함이 빛을 드러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서툰 영어가 어떻게 장점이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얼마 후, 지금 일하고 있는 병원에 입사 지원을 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한 50대 중년의 키위 여성 면접관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제 영어가 아주 큰 약점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약점을 제가 먼저 말하자, 면접관 두 명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건 너무 당연한 약점인데?'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제 영어는 아주 큰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두 면접관의 의아한 눈빛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나는 천천히 왜 서투른 영어가 나의 큰 장점이 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영어가 서투르기 때문에 오히려 환자의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영어가 모국어라면 쉽게 흘려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환자분이 제 말을 잘 이해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어려운 내용도 쉬운 영어로 풀어 설명해 주니 더 좋지 않을까요?"
두 면접관은 나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에 매우 만족했다. 결국 나는 운 좋게 지금 근무하고 있는 병원 사회복지사로 취직을 했다. 그렇게 나는 깨달았다. 내 삶의 가장 큰 약점이라 믿었던 영어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