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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자는 왜 영어에 목숨을 걸었을까?

달콤한 안정감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베팅을 했다.

by 굿네이버

"와, 대단하세요. 지치지 않는 의지, 타고난 공부 머리까지 겸비하셨네요!"

최근 나보다 한 살 많은 지인과 점심을 함께했다. 이민 7년 차인 그분은 개인적인 고민을 상담받고자 나를 만났다. 요즘 핫하다는 한인 식당. 매콤한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달콤한 양념 치킨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둘 눈앞의 진수성찬을 잠시 잊은 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반평생을 가위와 빗으로 살아왔던 그분은 진지하게 퇴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축 늘어진 어깨, 며칠 밤을 지새운 듯 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참에, 영어 공부라도 해 보시면 어떨까요?"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에이, 저는 의지도 약하고, 공부 머리도 없습니다."라고 고개 저으며, '자신은 나와는 다르다'라고 했다 그분은 마치 내게 '영어라는 거대한 장벽을 불굴의 의지와 타고난 머리로 가볍게 뛰어넘은 인생 위너'의 타이틀을 붙여주려는 듯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지'와 '공부 머리'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라고 다를 리 없었다. 영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시절,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리게 부러웠다. 심지어 지나가는 개가 주인이 하는 말을 꼬리를 흔들며 척척 알아듣는 것을 보고는 혼잣말로 투털거렸다. "진짜, 개도 저렇게 영어를 알아듣는데, 난 개만도 못 하는구나…"


나는 한마디로 완전히 영포자였다. 초, 중, 고 12년간 성적은 늘 바닥이었고, 스스로 '돌머리'라고 믿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다. 작심삼일, 의지박약으로 영어 공부 의지를 불태워도 하루를 못 넘겼다. 결국 영어는 마치 코끝까지 올라온 재채기를 터뜨리지 못하고 멈춰버린 것처럼, 마음 한쪽에 묵직한 답답함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한 번은 그 재채기를 시원하게 터뜨리겠다는 심정으로 큰마음을 먹고 아이엘츠 과외를 받아보기로 했다. 당시 유학생 엄마들 사이에 '김밥 선생님'이라는 별명으로 꽤 유명한 한국인 과외 선생님이 계셨다. 시간당 60달러, 온 가족의 일주일 치 식비와 맞먹는 수업이었다. 첫날, 김밥 선생님은 새것 같은 캠브리지 아이엘츠 제너럴 리딩 문제집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분은 지문을 단조롭게 읽고 해석한 뒤, "참 쉽죠?"라는 말을 앵무새럼 반복했다. 내 머릿속은 백지인데도 말이다. "당신이나 쉽지, 나는 아니라고요!" 외마디 비명이 목구멍 끝에서 맴돌았다. 속은 이미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득했다. 이 모든 짜증과 분노를 숨 쉬는 압력밥솥처럼 꾹 눌러 담고 있었는데, 그분은 기어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고 말았다. "음… 내가 보기에 영어 감각은 없지만, [영어를] 할 수 있어요." 그분은 좋은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내게는 "영어 감각이 없어"라고 규정하는 최후 선고처럼 들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성의 끈이 파열하며 멀리 날아갔다. "아놔! 진짜 열받네…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려고 식비를 털어 과외를 한 거 아니잖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부터는 그분이 내뱉는 모든 단어가 귀에 모래처럼 서걱거릴 뿐이었다. 남은 두 시간은 영겁처럼 길게 늘어졌고, 시곗바늘의 초침은 날카로운 소리가 되어 머리를 때렸다.


다행히 입에서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과외가 끝난 직후 손가락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더 이상 가족 식비를 이런 모욕적인 경험에 낭비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정이었다. 그 후 몇 주간은 아이엘츠 이름만 들어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거부 반응이 일었다.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저녁 직장인 반 영어 클래스에 2~3번 나가다 포기하고, 아이엘츠를 독학하려 책상에 앉았지만 책을 덮기를 반복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영어 부담감을 애써 외면했다. 처음 이민을 왔을 때만 해도, 오랜 이민 생활을 하신 분들 중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분들을 보면 이해하지 못했다. "왜 영어 쓰는 환경인데, 한국 사람들하고만 섞여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 역시도 손가락질했던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민 오면 영어를 자연스럽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오만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영어라는 짐을 바닥에 내려놓자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슈퍼마켓 계산대, 병원 접수처 등 영어를 꼭 써야 하는 몇몇 순간 외에는 삶에 딱히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뉴질랜드에 살았지만, 1년 365일 한국 사람을 만나고,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몸은 뉴질랜드에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민자였던 적이 없었다. 낯설고 차가운 세상 대신, 한인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만을 누리려 했다. 그렇게 정체된 5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울타리는 어느덧 나를 바깥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하는 거대한 유리 장벽이 되어갔다.


이민 5년 차였지만, 뉴질랜드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문화도, 법과 제도도 몰랐다. 아니, 알기를 거부했다. 현지인 친구는 한 명도 사귀지 못했고, 어디를 가나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순간, 삶 자체가 블랙 코미디처럼 아이러니했다. '왜 이 먼 땅에서 갇혀 살고 있지?' '인생의 나침반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인생의 지도를 잃은 듯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사라진다는 절망감에 정신과 감정의 축이 흔들렸다.


"여보, 나 한국으로 돌아갈래. 당신이 안 간다면 나라도 혼자 갈 거야." 벼랑 끝에 몰린 듯 아내에게 억지를 부렸다. 한국에 돌아간다 한들 황금빛 미래가 없음을 알았지만, 이곳에 단지 생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기에, 내 마음은 망망대해 위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참에 영어라도 공부해 보면 어때?" 얼마 전 내가 번아웃에 지친 지인에게 던진 그 한 마디는, 사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아내의 따뜻한 위로를 통해 내게 돌아왔던 조언이었다. 인생의 지도를 잃고 흔들릴 때, 아내는 '멈춤'을 권유하며 공부를 하라고 했다. 아내의 진심이 단단한 벽을 허물었을까, 귀국이라는 유혹 앞에서 흔들리던 마음을 접어두었다.


'이 지긋지긋한 영어의 굴레를 어떻게든 끊어내자'는 처절한 심정으로 공부를 결심했다. 사회복지 전공이나 대학교 진학 같은 거창한 비전은 없었다. 다만, 망망대해 위에 홀로 떠 있던 나에게 영어 공부는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가장 가까운 징검다리였다.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안갯속 인생에서 다음 스텝이 보일 것 같았다. 결국 생계를 지탱하던 월급의 절반을 스스로 잘라냈다. 풀타임 40시간에서 주 20시간으로 근무 시간을 반으로 줄였다. 눈앞의 현금 포기는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정이었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 이 좌우명을 새기며, 나를 질식시키던 안정감을 미련 없이 버리고 미지의 불확실성에 베팅했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했던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는 결혼 서약이 바로 이 순간, 가장 처절하고 진정한 의미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 한인 사회 울타리를 넘어 진정한 이민자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를 새 항로로 안내했다. 그 때,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결국 영포자로 살아왔던 내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힘은 불굴의 의지나 영특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민자의 삶의 미로에서 나를 잃고, 자아를 찾아내려 발버둥 치던 처절한 절박함이었다. '생존'과 '의미 있는 삶' 사이에서 떨리던 내면의 절규였다. 그 절박함만이 나를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혔고, 낯선 단어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발견하게 했다.


지금 고개를 들어 과거를 돌아보면, 절망 속에서 나를 꿰뚫고 들어오던 내면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냈던 것이 가슴 벅차게 감사하다. 그 소리를 봉인하고 단지 현재에 갇힌 채 '생존'만을 선택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심장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의 절규—출간 작가라는 꿈—를 더는 외면하지 않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마침내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또 누가 알까? 10년 후, 이 지난한 싸움 끝에 작가가 되어, 오늘의 절박함이 날카로운 펜촉이 된 여정을 기록하며 독자들에게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https://brunch.co.kr/@good-neighbour/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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