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정의 힘 Oct 19. 2021

중3아들과의 게임전쟁 1

어릴시절 아빠의 꿈

아들이 중1이던 2년 전 10월. 운동 마치고 밤 11시에 들어오니 아내가 거실에서 혼자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말 걸기가 무섭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어렵게 물어본다.


"왜, 무슨 일이야?"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내는 래퍼에 빙의되어 속사포를 쏟아낸다. 하이톤을 장착한 래퍼다.


두서없는 장황한 랩 속에 희미해져 가는 요점을 붙잡기 위해 방청객이 되어 잠시 랩을 감상한다. 나름 플로우가 있다.


아내의 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그래서 전혀 공부를 안 한다.

공부를 안 하니 갈만한 대학교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설사, 졸업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밥 먹고 살길이 걱정이다.


아내는 중1 아들을 벌써 대학교를 졸업시키고 구직에 애먹는 백수로 표현 중이다. 사실, 아내의 우려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항상 틈만 나면 게임을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등 단체 게임을 즐긴다. 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게임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 전략을 짠다.

<아들의 게임>

이런 모습만 아니라면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요리도 잘해주고, 인사도 잘하는 순하디 순한 아들이다. 하지만, 주말에 아들을 가만히 관찰하면 가끔 말 그대로 울화통이 터진다.


오전이 오후로 전환될 때쯤 기상 → 게임 → 게임 유튜브 → 밥 → 핸드폰 → 게임 → 게임 유튜브 → 밥 → 게임


위에 열거한 패턴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때의 아들의 주말 일과다. 그러곤, 자정이 넘어서야 잔다.


이를 보고 '아, 우리 아들 참 사랑스럽네'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안 보이면 괜찮은데 보이면 일단 화가 치민다.


그날이 딱 그날이다. 아내는 3개월 전 늦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시작했고, 아침에 독서실에 나가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은 아내는 집에서 쉬던 차였다. 항상 엄마가 없던 주말을 만끽하던 아들은 여느 때처럼 본인만의 패턴을 이어가다 낭패를 본 것이다.


아들은 제 엄마한테 한바탕 혼나고 곯아떨어졌다. 내가 들은 랩의 전투력이 가공할 만한 위력인데, 아들이 들은 엄마의 잔소리는 가히 '사자후'를 방불케 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들이 일어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이유를 묻는다. 왜 그리 장시간 동안 게임을 하는지. 아들은 친구들과 하는 게임이 재밌다고 한다. 또 친구들과 어울려 하다 보니 본인이 빠질 수 없단다. 즉, 게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Games must go on

이해하고도 남는다. 아빠인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6살 때부터 오락실에 입문하여 군대 전역 후에서야 게임을 끊은 경험이 있다.


소싯적 우리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갤로그, 보글보글, 스트리트 파이터, 사무라이, 용호의 권 등을 섭렵했다. 한번 게임기를 잡으면 한 시간 이상씩 죽지 않고 게임을 하곤 했다.

<아빠의 게임>

덕분에 단골이 아닌 원정길의 오락실에서는 주인아저씨한테 쫓겨난 적도 여러 번이다. 어떤 분은 게임비인 50원을 주고 나가라는 분도 있었고, 마음씨 좋은 분은 100원을 주기도 하셨다.


최악은 오락 중인 게임기를 그냥 꺼버린 주인아저씨였다. 물론 게임비도 안 돌려주셨다. 억울하고 분해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경험은 왠지 훈장 같았다. 게임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3, 4단계에 해당하는 '사회적 욕구'와 '존경의 욕구'의 중간 지점쯤의 욕구가 충족된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온 동네에 소문이 좌악 퍼진다.


"○○이가 게임을 오래 하다 ○○○ 오락실에서 쫓겨났데"

"또? 전에도 다른 오락실에서 쫓겨났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작은 게임대회에서 우승한 격이지 싶다.  


그리고, 갤로그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갤러리가 형성되곤 했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쟤 뚱뚱한 애 하는 거 봐. 손이 안 보여"

"100판째야, 100판째"


나는 짐짓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더욱 게임에 열중한다. 지금의 유명 프로골퍼가 그런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오락실은 만화방과 더불어 나의 중요 아지트였다. 중학교까지는 이 두 곳에서 보낸 시간이 아마 학교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에 얽매이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난 틈틈이, 그리고 땡땡이를 치면서까지 이 두 곳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후 1997년 전역 후 다시 찾은 오락실에서 난 쓰디쓴 좌절감을 맛본다. '철권'이 나에게 선사한 당혹스러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7년 게임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도와준 '철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처음 보는 게임이었지만, 난 10분 정도 게임을 지켜본 후 호기롭게 연승 중인 게이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모든 격투기 게임의 기본 메커니즘은 똑같다는 것이 십수 년간 익힌 나의 오락 철학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철권은 내가 명성을 날렸던 스트리트 파이터, 사무라이, 용호의 권 등의 격투 게임과 궤를 달리했다.


더 이상 게임이 일직선의 일차원이 아니었다. 그렇게 두세 번 더 도전했지만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난 무참히 박살나고 만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다.


"그래, 이쯤이면 됐다. 충분히 했어. 더 이상 미련 갖지 말자."


그 길로 난 게임을 끊었다. 그렇게 6살부터 23세까지 17년간 이어온 게임과의 인연이 끊긴 것이다.


덕분에 전국 20, 30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타크래프, 리니지라는 늪에 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게임을 끊지 않았다면 난 십중팔구 게임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게임을 사랑했던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오락실, 만화방, 분식점, 미니 슈퍼를 하나로 묶은 복합적 개념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온 세포를 집중해 게임을 하고 편안한 자세로 만화책을 보며 라면을 끓여먹고 과자를 입에 무는 삶이 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하기에 난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공감할 수 있었다. 급기야는 마음 편하게 눈치 보지 않고 실컷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아들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빠의 경험을 들려주며 아들과 게임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2022학년도 수능, '재수는 없다' 프로젝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