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팔팔하던 20대 후반에 나는 잠시 투잡을 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된 딸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정시 퇴근하자마자 나는 곧장 두 번째 직장인 보습학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쳤고 수업은 자정 무렵 끝났다. 집에 도착하면 12시 반. 비록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보람된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행복했다.
사실, '9시 출근, 6시 퇴근'의 회사는 나에게 익숙지 않은 여가시간을 선사했다. 벤처기업에서 주말을 포함해 매일같이 밤 10시까지 일했던, 한 달에 한 번꼴로 일요일 하루만 쉬었던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었다.
6시 퇴근은 정말 신세계였다. 퇴근해도 밖이 환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없었던 개념인,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여가시간의 활용이었다. 유흥을 좋아했던 신입시절, 나는 퇴근 직후 회사 선배들과 어울려 1차로 반주를 겸한 저녁을, 그리고 2차로 당구게임을 즐기곤 했다. 물론 술내기 게임이었다. 한두 시간 게임 끝에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면 우리 모두는 희비를 간직한 채 술집으로 향했다.
술자리가 한차례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런 날은 거의 없었다. 패자 측이 "복수"라고 외치면 승자는 거부할 수 없다. 미안한 마음 절반, '이참에 아예 무참히 짓밟겠다'라는 마음 절반으로 승자 측은 도전을 수락한다.
이렇게 모두가 비장한 마음으로 두 번째 술내기 당구게임을 했다. '저녁-당구-술-당구-술' 코스를 마치면 새벽 두 시가 다되어 귀가하기 일쑤였다.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닌 '8시간 유흥의 삶'이 된 것이었다. 물론 아내와의 잦은 다툼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점 그러한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생산적인 일을 찾다 투잡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 딸이 태어나 살림이 빠듯하기도 했다. 뜻밖에도 나는 투잡으로 경제적 보상 외에,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본 직업 이외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급여를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사회적으로 내 가치를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몇 개월 간 이어진 투잡에 피로가 누적되어 월차를 내며 버티던 때,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쉬이 회복되던 몸이 그때는 유독 버거웠다. 거기에 막 뒤집기를 시작한 딸이 아빠를 낯설어하는 모습에 '마상(마음의 상처)'을 입은 것이 결정타였다. 딸과 놀아주기 위해서라도 투잡을 끝내야 했다.
이후 회사생활의 단조로움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즈음, 각각 3개월 정도씩 두세 차례 더 같은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투잡을 했으며, 자택에서 전화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투잡 생활은 시간과 체력 소모를 동반했으며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30대 초반, 3년 기간에 걸쳐 1년 남짓 이어진 나의 투잡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기쁨과 보람의, 그리고 눈물의 투잡이었다.
젊은 날 치열하게 살았다는 증거인 투잡.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된 딸이 태어난 해 시작한,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았기에 주어진 일종의 훈장과도 같다.
40대 후반인 지금, 나는 아내가 없는 주중에 수능에 재도전하는 딸과, 고1 아들을 홀로 건사하며 또다시 치열하게 살고 있다. 이 시기가 훗날 나에게 또 다른 훈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속으로 되네인다.
'내가 참 고생이 많구나.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