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 홀로 육아인 줄 알았건만

아이는 온마을이 키운다

by 도토리

첫째를 가졌을 때 출산예정일 3주 전까지 일을 했었다. 임산부 배지만 없으면 임산부인지 아무도 모를 임신 초기부터 저 배가 똥배인가 임신한 배인가 보는 이를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중기를 지나 당장 애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임신 후기가 되어서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10개월가량 되는 기간 동안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은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도, 부모님들도 다들 '에이~ 과장이 심하네.' 라며 아무렴 그 정도로 인심이 팍팍할까 믿지 않는 눈치다.

나 역시 양보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늘 내가 타면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갈수록 실망스러웠다. 건너편에선 나와 같은 임산부 한 명이 에코백에 핑크색 임산부 배지를 단 채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매 출근길 만나는 그 분과 눈이 마주칠 때면 서로의 눈에 인류애 상실이 느껴졌다.

나는 그 당시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의 환경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 힘든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출생률 절벽이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기 안 낳아 걱정이니 애도 안 낳고 애국심 없는 이기적인 것들이니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임산부조차 배려받지 못하니 아이 키우는 부모와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나 싶었다. 가는 카페나 식당마다 노키즈존이 붙어있고(물론 카페나 식당 운영하시는 분들의 고충은 충분히 안다. 그렇게 전환한 사정도 이해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맘충', 잼민이', '하준이' 등 아이엄마와 아이를 비아냥 거리는 글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인기글로 올라온다. 매일 지하철에서 내 배만 흘깃 쳐다보고 모른 체하는 사람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온라인 속 그런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 키우기 참 삭막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아이를 낳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자리 잡았다. 아이와 식당이나 카페를 갈 때면 늘 죄인모드였고 집에서도 혹시나 밤중 아이의 울음소리로 이웃집에서 민원이 들어오지 않을까 내내 긴장했다. 휴직 서류 내러 학교 가는 길,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아이와 함께 탄 지하철에서 흘깃 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나의 어떤 행동이 '맘충'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인가 싶어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늘 곤두섰다.

작년까지도 이런 내 생각이 변함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아이는 온마을이 키우는 거라고. 아이 키우기 영 어려운 환경은 아니라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는 최근에 겪은 마음 따뜻한 경험들 때문이다. 첫 경험은 우리 아파트 같은 동 한 할머니이다.
"안녕하세요~" 남들과 똑같이 하는 인사임에도 말투가 고풍스러우셔서 늘 기억에 남는 할머니였다. 둘째와 함께 첫째 하원버스를 기다리고 오셨는데 인사와 함께 다가오셨다.
"혹시 몇 호 사세요?"
"네?"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몇 호 사시는지 몰라서 못 드리고 있어서요"
"아...♡♡♡♡호입니다. 아고 감사해요."
"나중에 똑똑 문 두드릴게요~"
사실 처음 이 대화를 마쳤을 때 생각은 '아 큰일 났다.'였다. 할머니의 그 고풍스러운 말투에서 나와 남편은 교회 다니시는 분일 거라 예상했다. 전도하러 오시는 게구나. 선물 주시면서 교회 오라 하시리라 짐작했다. 나는 선물을 주고 싶다는 그 감사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첫째 아이 하원 시키고 가방 정리 중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 어떻게 거절하지. 절 다닌다 할까. 아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 없어서 교회 못 간다 할까.'
"아유~ 여기 아기 차 있는 거 봤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왜 이게 안 보였을까요. 제주도 천혜향인데 냉장고에 넣어놔서 아주 차가워요. 먹기 전에 꺼내놨다 드세요~예전부터 주고 싶었어서..."
예상 밖의 말에 참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걸 의심하고 삐뚤게 보게 된 건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건네주신 가방 안을 본 순간, 동글동글 귀여운 천혜향 한 봉지와 함께 우도땅콩초콜릿 한 상자, 그리고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아이 키우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지나가는 이웃이지만 작은 격려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지금 이 시간, 아기와 함께 하는 이 순간들은 너무나 소중하기에(지나고 나서 보니) 더 감사하고 감사하며 보석들과 시간을 만드시길!!
큰 것 아니지만, 제주에서 가져온 천혜향입니다. 몇 날 전부터 드리고 싶었는데 정확한 호실이 기억나지 않아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많이 차가워요^^ 밖에 조금 뒀다가 두세요 (천혜향)
가방은 안 주셔도 됩니다.

편지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육아를 하며 혼자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알게 모르게 이렇게 응원하고 예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몇 번이고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이들과 함께 달콤한 천혜향을 까먹는 내내 육아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든든하고 행복했다. 비닐봉지 속 천혜향을 다 먹어 치우고 나서도 내 마음속에는 이웃 할머니께서 주신 따뜻한 편지와 달콤 새콤한 천혜향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적어도 한 달간은 육아번아웃 없이 잘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사건(?)이 물꼬를 튼 것일까. 도움받고 감사한 일들이 자꾸 생겼다.
어느 날은 잠든 아이를 안고 가다가(슬프게도 우리 아이들은 유모차를 안 탄다) 장본 비닐봉지가 터져버렸다. 비닐봉지 속에 들어있던 양파 10개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를 안고 다리를 굽혀 양파를 줍기 시작하니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던 남자 세 분이 우르르 달려온다. "괜찮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도로까지 굴러간 양파들은 다 주워다 주셨다. 부끄럽고도 감사했다.

또 다른 날은 여느 때처럼 산책하다 잠든 둘째를 안고 한 손으론 푸쉬카를 밀며 땀 뻘뻘 흘리며 아파트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우리 아파트는 고바위가 심한 곳이다) 한 아주머니께서 집 바로 앞까지 푸쉬카를 대신 끌고 데려다주셨다. 어디 가는 도중이셨던 것 같아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셔도 괜찮아요. 감사해요'라고 연거푸 말해도 아기 안고 얼마나 힘들겠냐며 내 손목 건강까지 걱정해주셨다. 함께 땀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오르던 그 날이, 다 데려다주시고는 부끄러워하시며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부리나케 달려가시던 아주머니의 그 뒷모습이 종종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매번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고차원 농담과 함께 '오다 주웠다'라는 마인드로 인형이나 간식거리를 툭 던져주시는 9층 할아버지, 베란다 창밖에 내놓아진 화분을 구경하는 아이에게 '너네가 꽃보다 더 예쁘다'며 매실 하나 똑 따주시던 1층 할머니, 볼 때마다 아이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예뻐해 주시는 경비할아버지와 청소할머니까지... 아이를 한없이 예뻐해 주시고 나의 육아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여태껏 많았는데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분들이 하는 아이에 대한 칭찬과 관심, 애정 어린 눈빛, 그리고 엄마인 나의 고생과 헌신을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는 말 등이 아이를 더 바르게 자라도록 돕고 엄마인 내가 더 행복하게 육아하도록 했으리라.

아이는 온마을이 키운다는 그 말,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도움을 받고 있었다. 배려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배려받고 있는 것이었다. 깨닫고 보니 아이 키우기 영 힘든 세상은 아닌 듯하다. 나 홀로 육아인 줄 알았건만, 아니라니 왠지 든든한 기분이다. 아이 둘,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니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미용실 가는 게 이렇게 행복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