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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Nov 09. 2020

아기 태명을 짓는 일

아기 '콩이'가 '콩이'라는 태명을 얻게 된 사연

아기 콩이의 최애 인형 중 하나인 '아기 코끼리 코야'. 알록달록 귀여운 얼굴에 몸은 헝겊 책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시 '꽃' 중

이름은 어떤 대상을 보다 분명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이름 모르는 어떤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번 스쳐 지나가는 행인처럼 낯설고 막연하지만, 이름을 아는 유명인은 전혀 교류가 없음에도 좀 익숙하고 아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이름은 수학의 원리나 경제학의 개념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생각들도 보다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한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싶을 때, 추상적인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싶을 때 이름을 붙인다.


많은 예비 부모가 뱃속 아기에게 태명(胎名, 배냇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더라도(나중에는 태동을 느낄 수 있지만 일단 임신 초기에는) 부모는 태명을 붙임으로써 아기를 더욱 실재하는 존재, 분명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나아가 교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뱃속 아기를 대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아내 뱃속에 자리 잡은 선물 같은 존재에게 '콩이'라는 태명을 붙여줬다. 태명이 있었기에 우리는 임신 기간 중 하루에도 수십 번씩 '콩이야'라고 아기를 부를 수 있었고, 말을 걸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기까지를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던 데에 태명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


난임 부부는 언제 태명을 지을까


보통의 경우 부모가 태명을 정하는 것은 임신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난 이후일 것이다. 산부인과를 찾아가 피검사나 초음파 검사로 임신 사실을 처음 확인한 뒤 뱃속에 자리 잡은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은 우리 부부는 그보다 더욱 빨리 태명을 지어야 했다. 우리에게는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내의 몸 안에 이식된 배아다. 우리는 위태롭지만 한 생명으로 자랄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소중한 존재에게 태명을 붙여주며 '꼭 만나자'라고, '꼭 만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태명은 보통의 경우 아기가 뱃속에 있는 동안 임시로 불려지는 것이어서, 출생신고를 위해 본명을 정할 때와 비교해서는 이름을 짓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일부 예비 부모는 일찌감치 본명을 정해두고 뱃속 아기를 처음부터 진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임신 여부가 미지수인 난임 치료 초기 단계여서 진짜 이름을 정하는 일을 서둘러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첫 시험관 아기 시술 때 배아에게 붙여준 태명은 바로 '알콩이'였다. 알콩이는 우리 부부가 인생에서 처음 지은 태명으로, 아기자기하고 사이좋게 사는 모양을 뜻하는 '알콩달콩'에서 따온 것이었다. 평소 장모님께서 우리에게 "알콩달콩 잘 살라"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나와 아내는 훗날 태명을 정할 때 이를 써먹어야겠다고 자주 얘기했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당초 우리는 첫 시험관 아기 시술에서 '알콩이'가 잘 임신된다면, 나중에 둘째를 만들 때 '달콩이'라는 태명을 뱃속 아기에게 붙여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시술에서 알콩이는 화학적 유산됐고, 우리는 둘째가 아니라 두 번째 난임 시술에서 달콩이라는 태명을 배아에게 붙여주는 선택을 했다. 알콩이를 다시 써도 상관없었지만 달콩이와 알콩이는 무언가 다른 존재 같았다. 아쉽게도 달콩이 역시 이름만 얻은 채 일찍 우리를 떠날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콩이'는 어떻게 '콩이'가 됐을까


다음 태명을 정할 때 알콩이와 달콩이를 다시 써볼까 고민했지만,  나와 아내는 두 태명을 그냥 제외하기로 했다. 두 존재가 떠나간 게 몹시 아쉬워서 아내와 나는 두 태명을 마음속에 담아 소중히 기억하기로 했다.


맘에 들었던 두 선택지를 제외하자 다음 태명을 정하는 일이 갑자기 어렵게 느껴졌다. 태명을 정하는 일이 처음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연달아 임신이 되지 않자 태명 정하기가 괜히 어려워졌다. 난 문득 다른 부부는 어떻게 태명을 짓는지가 궁금해졌다.


먼저 주위 사례를 살펴보니 조카들은 뱃속 시절 트렌디하면서 예쁘고 좋 태명으로 불렸다. 첫째 조카는 태명이 '넝쿨이'였다. 누나가 임신했을 당시 방영됐던 화제의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최고 시청률이 무려 45.3%를 기록했었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부르는 어감도 좋고 드라마 제목처럼 넝쿨째 소중한 존재가 누나 부부에게 왔다는 면에서 의미도 좋았다.


넝쿨이에 이어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 조카는 넝쿨이랑 부르는 소리가 조금은 비슷했던 '윙클이'였다. 윙클이는 '반짝반짝 빛나다'라는 의미의 영단어이자 걸그룹 소녀시대의 유닛인 태티서가 부른 히트곡의 제목이기도 한 '트윙클(Twinkle)'에서 따온 태명으로 의미도 좋고 느낌도 세련됐다. 난 두 조카의 태명을 이렇게 멋지게 지은 누나와 매형의 센스에 뒤늦게 감동했다.


태명 짓는 데 도움이 될 힌트를 마저 얻으려고 난 SNS와 인터넷도 찾았다. 명품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며 뱃속 아기에게 명품 브랜드명(샤X, 구X, 루XX통 등)을 붙여준 사례가 특이했고, 부부가 즐겁게 여행한 지역명을 태명으로 고른 사례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태명을 붙이는 법은 예비 부모들마다 천차만별이어서 다른 사례를 참고해 태명을 짓기는 어렵겠다고 난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돌고 돌아서 다시 '알콩달콩'을 참고해 태명을 짓기로 했다. 알콩달콩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만큼 다음 태명을 정하는 데에도 꼭 의미를 담아보자고 아내와 얘기했다.


"그럼 콩이는 어떨까."

나와 아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콩이가 태명으로 어떻겠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알콩달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면에서 제격 같았다. 또 시험관 아기 치료를 받는 우리의 상황을 태명에 반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콩'을 밭에 심는 일처럼 '배아'를 몸에 이식하는 일이니까. 그런 면에서 새 생명이 될 배아를 '콩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 보였다.


하늘도 우리가 들여 붙인 태명 '콩이'를 맘에 들어한 걸까. 콩이는 배아 단계를 지나 무럭무럭 계속 자라났고, 임신 41주가 하루 지난 2019년 연말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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