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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Jan 15. 2021

아기 태동을 처음 느낀 그날

막연했던 존재에서 분명하고 더욱 소중한 존재로

나와 아내가 이용한 임신출산 앱 '280days'의 모습. 화면에 나온 아기 캐릭터는 콩이를 대신해 말을 건네 주었다.

임신은 우리 부부의 인생을 뿌리째 변화시킨 엄청나고 중요한 일이지만, 임신이 되는 그 순간 곧바로 나와 아내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임신 당사자인 아내는 자신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일찍부터 실시간으로 감지하며 작은 달라짐에도 민감히 반응하곤 했다. 그러나 남편인 나는 '아내가 임신했다. 280일 뒤 아기가 태어난다'라고 내 삶의 변화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임신 초기 무언가 실감이 나지 않아 일상이 크게 바뀌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나는 아내와 산부인과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갈 때는 "추크 추크 추크" 소리를 내며 뛰고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검사 화면 속 아기의 모습을 보며 벅찬 감동에 쉽게 빠지곤 했다. 난 이때마다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자각했는데, 언제나 병원에서 나올 때면 그 변화의 크기는 작아져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아내 배를 만지며 아기에게 말을 거는 일상에서도 난 사실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말을 걸어도 아기가 듣고 있는지 무시하고 있는지, 아니면 엄마 배 안에 있는 게 정말 맞긴 한 건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난 막연하기만 했다. 아기를 향한 일방적 대화는 나에게 벽을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태어나기 전까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아기에 대한 막연함 때문일까. 예비 엄마 아빠를 위한 스마트폰 앱 중에는 뱃속 아기의 모습을 그래픽이나 캐릭터로 형상화해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이 여러 개 출시돼 있다. 나와 아내도 콩이가 배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변화하고 있는지가 궁금해 이 앱들 중 하나를 설치했고 콩이를 아기로 등록했다.


앱 안의 콩이는 14주에는 살구 크기, 15주에는 레몬 크기, 16주에는 키위 크기라며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지를 매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화면 속 자신을 누를 때는 '엄마, 항상 고마워요!!'라거나 '오늘의 아빠가 행복하기를 기도해요'라고 말을 걸어주기도 했다. 마냥 콩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스마트폰 앱 속 아기를 만나는 것은 나름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의 콩이는 막연한 존재였다. 난 앱 속 콩이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살펴보다가 문득 '내가 관심을 둬야 할 진짜 콩이는 아내 뱃속에서 안 보이는데, 스마트폰 앱에 집중하는 꼴이 이게 뭐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셋이라기보다는 아내와 나 둘 뿐인 듯했던 일상이 극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임신 21주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콩이의 태동을 처음 느낀 날이었는데, 2019년 7월 26일 금요일로 정확히 기억난다. 그 날은 나와 아내가(그리고 뱃속에 있던 콩이까지)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에 이사해 온 날로, 난 그날 밤 첫 잠에 들기 전 아내 배를 만지며 "새 보금자리에서는 더 건강하자"라고 말했다.


내가 아내 배를 만지며 말한 이유는 당연히 콩이를 향해서도 말을 건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콩이의 반응을 특별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아내 배 위에 놓인 내 손에 콩이의 힘찬 발차기가 느껴졌다. 때 아닌 밤중에 깜짝 놀란 나는 곧바로 불을 켜 아내 배를 분주히 살폈다. 콩이의 태동이 혹시 아내 배 위로, 그러니까 시각적으로 드러날지 몰라서 유심히 살펴보려 했다. 나는 재촉하듯이 "콩이야, 한번 더 차보렴. 아까처럼 한 번 더"라며 말했지만, 아기는 잠이 들었는지 그날 밤에는 다시 발차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처음으로 느낀 태동에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고 신이 났다. 일주일 전쯤부터 아내가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며 배를 만져보라고 자주 말했지만, 사실 난 콩이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답답하던 시기였다.


아기의 태동은 이때를 시작으로 자주 느껴졌고, 자랄수록 움직임은 커졌다. 콩이는 특정 소리를 들을 때는 더욱 활발히 움직이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태교 음악으로 노랫말이 없는 재즈와 뉴에이지,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려주었는데, 콩이는 이중 극적이고 휘몰아치는 느낌의 재즈를 들려줄 때 그야말로 엄마 배를 뻥뻥 차며 바쁘게 움직였다.


콩이는 출산일이 가까워질수록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에도 자주 반응을 해주었다. 나와 아내가 잘 잤는지, 잘 놀고 있는지를 물으면 아기는 대답이라도 하듯 몸을 활발히 움직이거나 발을 쭉 뻗어 보였다. 말과 말의 대화도, 서로 눈과 눈을 맞댄 만남도 물론 아니었지만 나와 아내는 태동을 느끼며 아기와 소통하고 있다는 기분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태동이 느껴진 뒤 아기는 막연한 존재에서 어느덧 분명하고 머지않아 만날 더욱 소중한 존재로 거듭나 있었다. 태어난 이후 직접 대면할 날이 정말로 기대되는 순간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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