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밖에 모르는 바보
기획작을 쓰려고 구상을 하다가 문득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자 지금껏 살아온 거처.
나는 일평생 서울에서만 살았다. 잠깐 다른 지역에 기거했던 적도 있지만 그곳에 산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라 내 서울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바꿀 정도는 되지 못한 터라 ‘서울에서만 살았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삶일 거다.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타지역의 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노원구에 사는 내가, 공릉동에 사는 친구를 건너건너 아는 정도랄까. 당시에는 인터넷이 그리 발달되지 않아 그것도 백에 하나일 정도로 드문 케이스였다. 내가 아는 친구들이란 다 동네 반경 2km 안에는 사는 애들이었다. 상중하계동까지.
그런 내게 '완전 서울애'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강원도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내가 달리 서울 깍쟁이 같이 굴었던 것은 아닌데, 여성스럽고 나긋한 어투가 아이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도 말투 때문에 여성스런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실제로는 로션도 안 바르는 성격인데) 전형적인 서울애 같다는 이야기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 좋기도 했지만 불편하기도 했다. 결국 재수없다는 소리 아냐?, 싶어서. 하지만 내심 은연 중에 우월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게 뭐라고. 여하튼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다시 입시를 치뤘고 원하는 학교, 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후로는 그때 경험했던 미묘한 지역색은 느낄 일 없이 다시 서울 촌녀의 본분에 맞게 살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돌고 돌며, 버스로 궁들을 바라보고, 앱으로 맥도널드를 시킬 수 있는 편리한 도시. 나를 기쁘게도 하고 좀먹기도 했던 사랑스럽지만 무정한 나의 도시.
내가 또 다시 '서울애'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서른 초반, 살사동호회의 뒷풀이 장소에서였다. 그들이 그 증표로 내세운 것은 나의 어투였다! 욕도 고상하게 할 것 같다는 자분자분한 어투. 그런 경험을 두 번쯤 하게 되자, 내 말투에도 사투리가 있나 보구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만 살았으니 서울 사투리를 쓰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번은 동년배인 회사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겨울이면 강가가 얼어서 거기서 스케이트를 탔다는 얘기에 "정말요?" 하고 되물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도리어 내 반응이 의아한 듯 "연천에는 그랬어요."라며 짧게 답을 했다. 그 일도 다시 '서울'이라는 카테고리가 떠오르게 한 계기였다.
나의 사고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공간에 얼마나 매어 있을까. 문득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의 대사가 떠오른다. “...어찌되었던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시대뿐만 아니라 공간도 우리의 지경을 구획짓는 요소 중 하나일 거다. 나는 이런 경험적 사고를 통해 한때 꿈마저도 서울 혹은 수도권 안으로 국한된 규격으로 꾸역꾸역 재단해 넣기도 했다. 맥세권이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주거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도시의 편리함에 중독된 전형적인 편의점 인간! 지금에야 암환자가 되어 자연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구력이 오래된 인생은 아니지만 청년 시기를 다 바쳐 공장 도시에 하나의 부품으로 살면서 느낀 이야기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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