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0만원에 폐가를 구입한 유튜버에게 자극을 받아
캠핑을 시작한 지 2년 차가 되었다. 비록 수백만 원이 넘는 장비들로 우드우드하게 세팅한 감성 캠퍼도 아니고, 행군 가방을 멋지게 등에 맨 채 숨은 스팟을 찾아다니는 노지 캠퍼도 아니지만 중고로 구입한 구식 스파크에 한 짐을 가득 싣고 내 개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당찬 여쏠(여자 솔로) 오토캠퍼, 개캠퍼다.
얼마 전, 가장 좋아하는 캠핑장에서의 2박을 끝으로 올해의 캠핑을 종료했다. 타는 듯한 여름과 히터를 틀어야 하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자체 휴업을 한다. 텐트 안에서 난로를 피우고 잠들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저승이의 부름을 받을까봐 겁이 나서다. 그래서 지난 주 침낭과 담요는 빨아서 넣어두고, 야전 침대와 버너는 집 안에 옮겨두었다. (혹여나 차 사고 났을 때 트렁크에 있는 가스가 터질까봐서 무섭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염려증 중증 환자일지도 모른다. 오죽, 내가 매주 꼭 챙겨보는 TV프로그램은 '아형'도, '놀면 뭐하니'도 아니고 SBS에서 하는 '맨인블랙박스'라는 프로그램일까. 다양한 자동차 사고를 다루는 로포 프로그램인데,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놀랍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송이다. 공감하시는 분?)
캠핑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바야흐로 2년 전,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였다. 뉴욕으로 이주한 오빠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휴가 기간에 뉴욕을 찾곤 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에서 무전취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며 말이다. 세상, 가족애라고는 개에 대한 애정의 반에 반도 없는 내가 오빠를 찾아 13시간의 비행을 감내했던 이유는 절반 이상은 뽕을 뽑아보자, 오빠 찬스 좀 노려보자는 심정에서였다.
처음 뉴욕에 갔을 때는 별천지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인턴>, <비긴 어게인>, <나홀로 집에>, <섹스 앤 더 시티>에서나 봤던 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여기가 세트장인지 현실인지 아찔할 정도였다. 헐리우드 영화가 오랫동안 남몰래 차곡차곡 심어놓은 필터가 뉴욕을 자유의 상징, 예술의 도시로 보이게끔 했다. 그런 환상적인 감상을 품고 다시 뉴욕을 찾았을 때는 왜인지 불쾌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담배냄새, 쓰레기 냄새, 한 블럭에 한 분이상은 있는 것은 같은 노숙자들, 예상치 못했던 기온 변화... 필터가 걷히자 뉴욕의 다른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이상 시내를 배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뉴저지 외곽에서 조카를 픽업하고 드랍오프하는 새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할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주에 오빠네 가족과 함께 차로 5시간 정도 떨어진 필리델피아의 한 캠핑장을 찾았다.
미국의 자연은 불암산만 봐오던 내게는 광활한 우주였다. 또 대서양처럼 광대했고, 몽골의 대평원처럼 아득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2차선 도로 옆으로 우뚝 선 커다란 나무는 복붙한 것처럼 계속 이어졌고, 이 길이 끝이 있을까 싶을 때까지 우리 미완의 가족은 달리고 또 달렸다. 안전시트 사이에 낑겨 앉은 나는 3시간을 줄곧 어떤 이야기인가를 지어내거나 노래를 불렀고 목이 쉴 때쯤에서야 겨우 눈을 붙이곤 했다. 그러다 한 놈이 쉬가 마렸다고 하면 화장실에 들러 발이 훤히 보이는 미국식 공중화장실에 수분을 떨궈냈다. 그러다가 한 놈이 다른 한 놈에게 시비를 걸면 왕 하고 울 때까지 차 안은 그야말로 액션의 세트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아수라의 진수는 비좁고 지루해도 2억 만 리에서 고모라는 존재로 인해 원가족보다 조금 큰 단위에 가족애를 느끼게 된 아이들의 달뜬 감정이 아니었을까.
캠핑장에서의 2박은 보모와 다를 바 없었지만 녹음 속에서 자고 일어나고 먹는 일은 그 피로도 가시게 했다. 캠핑장에서의 이틀은 미국에서의 그 어떤 시간보다 새로웠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자극이 아니라 쉼이었던 것이다. 물론 중요한 짐은 다 놓고 온 오빠님 덕분에 (새언니의 구박을 엄청 받음) 차를 타고 마트를 몇번이나 들락날락해야 했지만 캠핑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게 아닌가. 다 즐거웠던 소동으로 기억에 남는다. 조카들만치 물속에서 하도 놀아대서 이후로 나는 더는 ‘피부가 하얀 애’라고 불리지 않게 되었다.
한국으로, 그곳도 서울로 돌아온 이후 한동안 그 느긋함이 고팠다. 그래서 장비가 모두 갖춰진 글램핑을 시작으로 캠비 장비를 하나둘 사모아 2년차쯤에는 ‘(미니멀이지만) 다 이루었다’ 레벨이 되었다. 그런데 캠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다. 내가 차를 몰고, 내가 텐트 치고, 내가 텐트 접는 일은 꽤나 고단했다. 보통 여자들 중에서도 나는 썩 체력이 좋지 않은 타입에 속한다. 하기야 암환자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든 가볍게 떠나, 가볍게 주말을 보내고, 덜 피로하게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럴려면 세컨 하우스가 답이었다.
최근 유튜브에서 떡상한 ‘오느른’이라는 채널이 있다. 서울 mbc에서 피디로 재직 중인 oo씨가 김제에 4500만원에 폐가를 사서 집을 수리하고 동네 어르신과 살 부대끼며 사는 것을 담은 채널이다. 논두렁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시골집의 풍광과 정감있눈 시골 라이프스타일은 젊은 사람들에게 세컨 하우스에 대한 로망을 뽐뿌질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서울을 떠날 수는 없지만 선택적으로 벗어나 살면 어떨까.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모든 것을 즐기는 문화로 바뀌게 되면서 주거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비싼 부동산 만큼이나 소박한 세컨 하우스를 긴절히 원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꼬박꼬박 내 유튜브 영상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던 친구는 요즘 시골집 고치는 이야기가 재밌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유학 중) 시골집을 매매하겠다고 했다. 홀연히 내 레이더 속으로 친구가 들어온 순간이었다. 산전수전 공중 전까지 다 지낸 우리는 돈을 섞어도 될 만한 사이였다. (1년을 일본에서 같이 살았고, 그 이후로도 십여 년간 서로의 사정을 잘 일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는 해에 6천만 원 정도를 들여 세컨 하우스를 구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친구는 겁쟁이라 내가 필요하고, 나는 인테리어 전공자인 친구가 나서면 공사 비용이 절감되지 않을까 싶어 친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말 정도면 충분히 즐거운 동거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캠핑 그 이상의 꿈을,
서울이 아닌 곳에 내 한 몸 쉴 곳을
마련해보고 싶다.
서울순이의 다정한 이중생활을 꿈꾸며.
가장 즐겁고 감미로우며, 가장 순진무구하면서도 용기를 북돋워주는 만남은 어떤 자연물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했다. 불쌍하게도 인간을 지독히 혐오하는 사람이나, 지독히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힌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나는 아직까지 고독만큼이나 편안한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방에서 혼자 지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외롭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혼자다. 그런 사람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두자. 고독은 당사자와 다른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에서
*출판사 편집자의 책 만드는 일상과 취미를 담았어요. 캠핑 관련 영상과 <월든>의 문장을 만나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HRZ1GugX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