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가 갖는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목숨까지 바쳐야 하나? 법 공부를 해야 하나?
직업에는 직무가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데, 그 조직이나 회사에서 꼭 필요한 능력이나 업무이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술과 경험도 필요하다. 지위나 연차에 따라서 직무는 변하기 때문에 지식과 기술, 경험을 적절하게 업그레이드해야 그 회사에 필요한 사람으로 계속 남을 수 있다.
이런 직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소방관과 군인의 예를 들어 보면 이런 고민의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한다. 화재를 진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소방관이 불을 끄는 일이 위험하다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군인도 비슷하다. 군인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못하겠다는 것이 용인될까? 소방관이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불을 끄는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거부하는 경우이다. 군인이 전투를 앞두고 집에 변고가 생겨서 급히 귀가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화재 진압이라는 임무와 전투 임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모습은 똑같다. 왜 참여하지 않았느냐를 설명하는 이유만 다를 뿐이다. 목숨을 잃기 두려워서 임무에서 빠진 것과 시급한 집안 일로 인해서 임무에서 빠진 것을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 만일 처벌을 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더 엄하게 다루어야 할까?
가만 생각해 보면 소방관, 경찰, 군인은 극한 직업이다. 원래 임무가 위험하고 힘들어서 극한 직업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머리가 아프기도 한 직업이어서 더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무를 받았는데 해도 되는 것인지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수명 하는 입장에서 판단하기 애매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 강령에 따르면 위법한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 허나 모든 일에는 '회색 지대'가 존재하는 법. 명령을 수행하려니 합법과 비법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경계에 있음을 인지한 것 자체가 훌륭한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법률가에게 검토를 의뢰할 여력은 없다. 시간 등 여러 가지 여건 상 결국 '건전한'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이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 기술에 '법률'도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률가들이 로스쿨에서 3년을 힘들게 배우는 것이 법인데, 그것도 알아야 하는 극한 직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요즘 이들은 아주 죽을 맛일 것 같다.
극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소방관이나 군인이, 경찰이 훈련을 하는 이유 중 중요한 것 하나가 서로 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이다. 말로 소통하고 판단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조건반사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편이라고 믿는 것인데, 그 믿음의 원천은 추상같은 공정함이라 생각된다. 흔히 카리스마 즉, 인간성 혹은 인간미가 신뢰의 원천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직장 혹은 조직에서 만난 사람은 개인적인 관계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직장에 속하지 않았으면 볼 일이 없었을 사람인데 나와 일하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좋고 나쁜 것은 나중 문제이다.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업무를 추진하는 데 공정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업무적인 신뢰가 쌓였다는 전제 하에 인간적인 관계를 엮어 가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만나 술 한잔 하는데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주치의처럼 고문 변호사를 고용해야 할 시기가 올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