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서의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 아침 7시에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17시에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굉장히 단순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우선 배가 완전히 낫질 않아서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정말 힘들었다. 너무 빨리 걸을 수도 없고 너무 늦게 걸을 수도 없고,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뭔가 모를 복부에 전해지는 부담감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병원이 광안리 앞에 있어서 광안대교를 보며 산책을 많이 했는데, 아프다 보니 산책도 하는 둥 마는 둥이라 괴로웠다.
이런 아픈 증상은 헤리주사라는 묘약을 맞고 급속도로 개선이 되었는데, 헤리주사(싸이모신알파 1, 1.6mg)는 정말 소름 돋게 내 면역력을 끌어올려주었다. 헤리주사를 검색해 보면 주로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노인들이 독감주사를 맞기 전에 맞는 주사라고 나온다. 이 주사는 흉선을 자극해 면역물질을 자발적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면역력을 끌어올린다고 한다. 나는 이 주사를 처음 맞은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힘들고 만사 짜증이 나던 어느 날이었는데, 이 주사를 맞은 순간 갑자기 기력 뽝! 생기면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식욕도 돋아서 음식도 이전보다 많이 먹었다. 주 3회 정도 주사를 맞으면서 체력은 삽시간에 올라왔고 항암을 예정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체력적으로 조금 살만해지고 나서 대학병원 외래진료를 갔다. 수술 후 첫 외래진료였다. 대충 배를 몇 번 만져보시더니, 다 괜찮아진 것 같고 항암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조직검사 결과 대장암 2기 B단계입니다. 통상 2기라도 침윤정도에 따라 A, B, C로 나누는데, A인 경우에는 수술로써 그 치료가 끝나지만, B, C의 경우에는 항암치료를 통해 잔존할지도 모르는 암세포를 사멸시킵니다. 그동안 이런 경우에 8회의 항암치료를 하는 게 보편적이었으나, 최근 학계의 연구 및 실험을 통해 4회나 8회나 별 차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4회(3주 간격) 항암치료를 하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너무 명쾌한 설명에 토를 달 수도 없었다. 안 하면 안 돼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잔존할지도 모를'이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네 하고 돌아와서 다음 달 1일부터 항암 일정을 잡았고, 나는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다.
요양병원에 외래진료 결과를 말하자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향후 진료 방향을 정해주셨다. 나는 특별한 케이스는 아닌가 보다. 알겠다고 하고 내 병실로 올라와 쉬었다.
요양병원이 내가 흔한 환자인 것처럼 말해서 겁은 덜 났는데, 문득 이런 식의 요양병원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사람, 특히 암환자만을 대상으로 이렇게 케어를 해주는 병원을 운영할 생각은 누가 먼저 한 거지? 주로 실비보험이 잘 설계되어 있는 사람들을 주요 고객인데, 요양병원은 환자보다는 보험회사 상대로 운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오래전 엄마가 보험을 잘 설계해 주신 덕분에 보험의 순기능을 제대로 누리며 요양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보험 하나 없던 남편은 보험이라는 제도를 다시 보게 되어 이 기회에 암보험도 하나 들게 되었다.
그러고 항암치료를 하기 전,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만났다. 고맙게도 나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써 줬구나.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울면서 전화가 온 동료였다. "왜 너한테 이런 일이 생겨"라며 엉엉 우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나는 사실 한 번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아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편이 좀 따뜻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나보다 더 많이 우는 것 같은 그를 진정시키고 곧 있을 항암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