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아빠일까?
어릴 때는 명절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맛있는 음식과 쏠쏠한 용돈이 생기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도 쉬어서 금상첨화. OTT나 VOD가 없던 시절이라 TV 특선영화를 보며 연휴를 만끽했다.
지금은 다르다. 어른의 명절은 정말 다르다.
돈 나갈 일, 신경 쓸 일도 많고 말만 연휴다. '연'속으로 '휴'가 없다. 설날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이번 명절도 무사히 넘겼구나 안도한다. 명절 연휴에 오히려 쌓인 피로는 풀기도 전에 일할 생각 하니까 조금 답답하다. 떡국과 튀김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건 분명 아니다. 새학기 강의계획서 입력하고 집필에 연구계획서도 작성해야 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지만 일부러 시간 내서 비교적 신작인 <위키드>와 <베테랑2>를 봤다. 10개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영화관과 많이 멀어졌다. 대신 OTT랑 VOD와 가까워졌다. 그나마도 명절이라고 아내랑 시간을 맞춰서 보긴 했다.
평소 아이를 재우면 저녁 7시 반쯤. 그때부터 정리하고 샤워한 다음 각자 할 일을 하거나 최대한 잠을 미루며 휴식을 취한다. 주로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달콤한 휴식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다음날을 위해서라도 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정하지 않으면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다. <위키드>는 이틀밤에 걸쳐서 봤다. 영화를 끊어서 보다니 예전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을 수용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정도도 만족스럽다.
우리 집은 양가 모두 가깝다. 그래서 평소에도 자주 왕래하는 편이다. 먼 길을 가거나 불편한 외박을 할 필요가 없다. 조부모님의 부재와 여러 사정으로 명절이라고 꼭 찾아가야 하는 친척집도 없다.
내 아버지는 형제가 많다. 집안의 큰 며느리인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하셨다. 그런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고 우리 형제 부부는 그 덕을 보고 있다.
이번 설 전날에는 찜닭과 갈비를 먹은 다음 본가 인근 명소를 온 가족이 둘러보며 소화를 시켰다. 원래 지난 추석 때처럼 전시회 관람 후 외식 예정이었는데 휴관 관계로 계획을 변경했다. 마무리는 로스터리 카페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설날에는 위령미사를 다녀와서 부모님께 세배 후 떡국을 먹었다. 튀김과 갈비 맛도 좋았다. 음식을 차리는 것부터 설거지까지 우리 형제가 맡았다. 마무리는 역시 커피. 요즘은 설날 당일에도 아이스바닐라라떼를 편안하게 배달시켜서 먹을 수 있는 시대라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아이와 함께 보낸 첫 설날. 집에 돌아와서 홀가분했다. 이런 명절이라면 그 의미를 제대로 되새길 수 있을 것 같고 기다려진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몇 해 전 우리 부모님이 가장 큰 어른인 명절을 처음 맞이하면서 마냥 좋을 줄 알았다. 그 무렵에 결혼을 했는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대가족의 속박이 풀렸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명절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길 원하셨다. 당연히 두 며느리의 참여가 필요했다.
물론 예전에 어머니가 고생하던 때와 달리 며느리에게 음식을 다 맡기는 건 아니었다. 재료 준비부터 요리까지 대부분 어머니가 직접 하시고 우리는 보조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나의 대안은 명절 음식을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지 않다. 그래도 조리 정도는 곧 잘한다. 설날과 추석 때면 한살림에서 질 좋은 냉동 동그랑땡과 부침개, 유정란을 사서 넉넉히 부쳤다. 양가 똑같이. 거창한 과정은 아니라도 시간과 정성을 담았다. 밑반찬 정도지만 식구들이 한 끼 이상 거뜬히 먹을 수 있는 양이고 누구나 좋아할 무난한 맛이라 애썼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함께 명절 음식 만드는 재미를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나름 음식을 준비해 오는 성의를 좋게 봐주셨다. 아이가 생길 때까지 몇 년 동안 그렇게 하다가 지금은 명절에 나들이 후 외식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정착시켰다. 일련의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노력을 많이 했다. 부모님에게 이해를 구하는 대화를 포함해서 말이다.
부모님은 지금도 내가 음식을 만들어간 것을 모르신다.
매번 우리 부부가 준비했다는 식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식재료 준비는 함께 하기도 했고. 솔직한 걸 좋아하는 아내에게 이유를 말하며 그냥 넘어가자고 잘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서 명절에 발생 가능성이 높은 고부갈등의 불씨를 사전에 없애고 싶었다. 결과는 일단 성공적.
어머니와 아내의 건강한 관계 유지를 위해 계속 노력 중이다. 현재까지 양호한 상황인데 딸(손녀)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내가 사랑하는 세 여인이 화기애애한 사이를 지속하도록 뒷받침하는 것, 아빠의 명절이 만족스럽지만 긴장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모두가 평화로운 명절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