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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r 27. 2021

사람을 기억하는 길

인왕산 자락길

성곽길과 숲길, 사람이 사는 동네를 동시에 품고 있는 서울 인왕산.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울창한 숲 덕분에 사계절 내내 진한 자연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산이다. 산길을 오르며 만나는 종로의 풍경은 깊게 숨어있던 차분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인왕산을 즐길 수 있는 루트는 다양하다. 전망을 보기 위해 오르고 싶다면 정상으로 가는 길을, 그저 가만히 걷고 싶다면 인왕산 자락길에 들어서면 된다. 자락길은 대부분이 데크길로 이뤄져 있고 코스도 길지 않아 1시간 30분 정도 산책하기 좋다.   


지난여름의 이른 아침, 인왕산 자락길에 다녀왔다. 윤동주 문학관을 시작으로 시인의 언덕, 수성동 계곡으로 걸었다. 편안히 데크길을 걸으며 울창한 숲을 즐겼다. 예쁜 구름다리도 지나고, 여러 전설이 깃든 거대한 바위도 만났다. 제일 좋아하는 곳은 수성동 계곡이다. 분명 서울 한복판인데, 어디 깊은 산골에 온듯한 깊은 계곡. 이날은 수량이 적어 아쉬웠지만, 계곡의 웅장한 느낌은 콸콸 쏟아질 폭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20대 후반에 회사에서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을 과연 친구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있지만 어쨌거나 친구 비슷하게 지냈다. 꽤 친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와 연락이 뜸해지고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서 그런가,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목소리도 희미하다. 언젠가 그 친구와 함께 인왕산에 오른 적이 있다. 성곽길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을 하염없이 올랐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둘이 헉헉대느라 말도 못 하고, 가끔 눈이나 마주치며 웃었다. 그 친구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다 ‘사진 촬영 금지’라는 표식을 보고 아쉬워했고, 사람에 의해 밟히고 쓰러진 작은 풀을 보고 가슴 아파했다. 청바지를 입고 산에 온 건 아쉽지만, 배낭에 먹을 건 잔뜩 싸왔다던 그때 그 사람. 


걸으며 인왕산 정상 쪽을 바라볼 때면, 종종 그 친구가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포항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10년 전에도 인왕산 자락길이 있었던가? 자락길을 걸을 때면 청바지를 입어도 될 것 같은데, 근처 부암동에서 같이 차를 마셔도 좋을 텐데. 박물관과 미술관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인왕산 자락길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나 청운 문학도서관도 좋아했을 테다.      


이제와 다시 함께 인왕산에 가게 된다면 자락길을 선택할테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숲길, 바위 사이로 흐르던 물길. 이겨내려 애썼던 회사생활을 서울 도심에 남겨두고 어디 먼 계곡으로 함께 피신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곳. 수성동 계곡은 '인왕제색도'의 배경이 된 곳이라 얘기나누며 그가 가지고 있던 동양화에 관한 교양을 함께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그 친구와 함께했던 모든 일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성곽길의 하얀 돌담,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친구의 뒷모습 그리고 메고 있던 검은색 배낭은 또렷하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여러 성곽길을 걸을 때면 늘 그 친구가 떠오른다. 포항에 있는 성곽길을 걸을 때면 그 친구도 나를 떠올릴까.     


함께 걸은 길은, 사람을 기억하기에 좋은 매개체가 된다. 도림천 길을 함께 걸었던 누구, 우면산 숲길을 함께 걸었던 누구, 금정산 둘레길을 함께 걸었던 누구. 풍경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면 기억하기에 좋고 잊기도 힘들다. 함께 걸어 좋은 추억이 되고, 행여 일그러진 기억이 있어도 함께 했던 숲의 풍경으로 정화된다. 같이 좋은 길을 걷는다는 건, 서로에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소중한 사람과 함께 숲으로 향해보자. 당신을 오랫동안 기억하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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