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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Apr 13. 2021

국화의 무게

홍천 무궁화수목원

수목원 이름은 대체로 지역이나 산, 혹은 나무의 이름을 딴 곳이 많다. 서울 수목원, 광릉 국립 수목원, 은행나무 수목원, 경북 봉화 백두대간 수목원처럼. 크고 울창한 나무숲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그런가, 수목원이라고 하면 아기자기한 정원의 이미지보다는 어느정도의 규모를 보장해야 하는가 보다. 그러한 수목원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수목원 이름을 꽃이름으로 정한 곳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사실 꽃을 수목원의 이름으로 쓰면 ‘수목원’이라는 단어와 평형이 잘 맞지 않는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운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벚꽃 수목원', '아카시아 수목원', '민들레 수목원', '프리지아 수목원'이란 이름을 듣는다면? 꽃 이름은 가볍고, 수목원은 나무 수(樹)와 나무 목(木)을 쓰다 보니 무거운 느낌이다. 하지만 무궁화 수목원은 왠지 그 양쪽의 무게가 비슷한 것 같다. 무궁화가 국화라서 그런가. ‘무궁화’를 ‘수목원’과 함께 나열해보니 문득 국화의 무게가 느껴진다. 


어렸을 땐 동네에 무궁화가 가득했다. 여름부터 피기 시작해 겨울 직전까지 꽃을 피웠다. 정말 무궁(無窮)한 개화였다. 산중턱에 있던 5층짜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올라가는 내내 피어있던 무궁화를 애써 무심히 지나쳤다. 무궁화 근처에 늘 벌이나 벌레가 많았는데, 그게 무서워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무궁화에서 멀어지자니 차도에 가까워지고, 차를 피하자니 무궁화 꽃잎에 있는 벌레가 닿을까봐 무서웠다. 요즘은 무궁화를 볼 수 있는 거리가 잘 없는 것 같다. 아카시아나 벚꽃, 진달래는 여전히 많은데 무궁화는 영 생소한 꽃이 되어가고 있다. 매거진 취재차 홍천에 들렀던 어느 날, 벼르고 있던 무궁화 수목원으로 향했다. 


무궁화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내가 아는 무궁화라곤 애국가에 나오던 그 분홍색 무궁화, 어릴 적 피해갔던 그 하얀 무궁화가 다인 줄 알았다. 수목원에는 무려 100종이 넘는 무궁화가 있다고 한다. 8천 그루가 넘는 무궁화를 심었다고 했다. 한쪽에 무궁화 나무를 끼고 걸을 때는 어린 시절 생각도 났다. 한여름에 활짝 핀 무궁화 밭 사이를 거니는 것은 벚꽃길이나 아카시아 길을 걷는 것과는 또 다르다. 흩날리는 벚꽃길이 걸음을 재촉하는 길이라면, 큼직한 보석처럼 콕콕 박혀있는 무궁화 꽃길은 걸음을 멈추게 하는 길이다. ‘꽃’이란 글자와 꼭 닮은 꽃, 익숙하기도 하고 이제는 조금 낯설기도 한 그 꽃.


이곳도 여느 수목원과 같이 다양한 수목의 테마원이 조성되어 있다. 온실, 장미원, 연못, 침엽수원 등. 산책로도 널찍하고 평평하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있고, 무궁화와 좀 더 친근해질 수 있는 시설도 여럿 마련되어 있다. 소풍하듯 쉴 수 있는 곳도 있다. 무궁화 수목원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무궁 누리길은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다. 누울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고, 하늘도 보고. 쉬기에도 걷기에도 딱 좋다. 


이제는 국화도 친근함을 강조해야 할 시대가 됐나 보다. 성스럽고, 고귀한 것보다는 대중적인 꽃으로 기억되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 같다. 무궁화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꽃은 우리나라 꽃이 됐고, 벌레가 많다고 미움을 받다가 거리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홍천과 보령에 있는 무궁화 수목원이 계기가 되어 전국 곳곳에서 무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날이 또 왔으면 좋겠다. 과거에 한참 도심에 많이 피어있던 무궁화를 다시 한번 도심 곳곳에서 만나고 싶다. 흩날리는 꽃도 좋지만, 긴 시간 개화하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는 꽃도 바라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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