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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Apr 14. 2021

차마 가지 못했던, 하얀 황금빛의 억새밭

부산 승학산

다롱이. 이 이름을 이렇게 써 보는 것은 처음이다. 다롱이는 중학생 때 잠깐 함께 살았던 강아지다. 월셋집에 사는 처지에 강아지를 키우는 건 사치였다. 주인 할머니가 싫어했단 이유로 다롱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학교에 다녀온 사이 엄마가 다른 데로 보내버렸다. 그날 이후, 다롱이는 새로 자리 잡은 해운대 집에서 홀연히 집을 나가 유기견이 되었다고 한다. 그다음은 잘 모르겠다. 이미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났으니, 다롱이는 강아지 천국에 가 있을 거라는 것밖에, 나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롱이와는 늘 승학산 자락에서 산책했다. 승학산은 갈대숲으로 유명하다. 10월 중순이 넘어가면 숨넘어갈 듯 넘실대는 억새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가을의 황금빛 햇빛에 반짝이는 솜털 같은 식물의 파도. 내게 그 풍경은 좌로 뛰고 우로 뛰며 토끼처럼 산을 뛰어다니던 다롱이로 가득한 풍경이다. 작은 단칸방을 오가는 것이 세상 전부였을 다롱이. 강아지가 그렇게 신나게 뛸 수 있다는 걸, 승학산의 다롱이를 보며 알게 됐다. 반짝이는 황금 물결 사이로, 반짝이는 흰 털을 가진 다롱이가 보석처럼 뛰었다.


한쪽으로는 낙동강, 또 다른 쪽으로는 부산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 500m 높이에서 산과 강, 바다와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승학산이다. 승학산 능선을 따라 여러 동네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렇게 이웃이 만들어진다. 어렸을 땐 승학산을 끼고 있는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사하며 친구도 만들고, 이웃도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부모님은 승학산 자락에 살고 계시고.


엄마는 기억할까. 다롱이와 늘 산책하던 그 공원이 있던 곳이 승학산이란 걸. 다롱이에게 보석 같은 기억이 남았다면 아마 그곳은 여기일 거란 걸. 상의도 없이 떠나게 된 아리송한 다롱이의 견생중 유일한 행복이었을 곳이 이곳이라는 걸.

"예전에, 엄마가 중학생이었을 때.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살았어. 어느 날 하교해서 보니 강아지들이 없어진 거야. 외할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고 하더라고. 외할머니랑 한 달을 말을 안 했어. 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칠까 봐 그랬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너무하다고 생각했지."


엄마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럼 왜 20년 전에 다롱이는 그렇게 보냈어.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다롱이는 엄마와 나 사이에 유일하게 말할 수 없는 금단의 이름이기에. 엄마도 그 고백 뒤에 엄마의 강아지들과 함께 다롱이도 떠올렸을까.


매번 부산 집에 갈 때면, 늘 승학산에 가보려고 한다. 오르는 중에 만나는 편백나무 숲, 깊숙하지만 안전한 오르락내리락 재밌는 등산로, 세상 모든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장관을 느끼기 위해. 중간에 마련된 피크닉하기 좋은 평평한 숲. 가만히 앉아있으면 하늘 끝까지 곧게 솟은 나무 숲에서 위안을 얻게 되는 곳. 그곳에서 다정한 엄마와 함께 먹는 맛있는 김밥. 꽤 많은 사람이 찾는 승학산의 억새밭. 하지만 가을의 승학산엔 오르지 않는다. 하아얀 보석 같은 내 강아지가 그곳에 없을까봐. 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은 중학생 앞에서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뛰고 있을까봐.


강아지와 함께 승학산에서 뛰다 생긴 무릎의 깊은 상처도, 부모님 집에서 보이는 승학산 봉우리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보석을 상기시킨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얀 솜사탕 같았던 강아지. 다롱아, 이번 가을엔 널 보러 가볼게. 춤추는 갈대와 반짝이는 바다. 하늘의 바람과 바다의 바람이 만나는 그곳. 우리가 매일 밤 걸었던 오르막이 있던 그곳. 매일같이 네가 쉬야를 하던 그 나무로, 올해는 꼭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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