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각자의 여정, 깨달음은 각자가 해내는 몫
삶의 배움에는 직접 경험하고 부딪혀서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앞서 이 길을 지나간 누군가가 덜 고생하라고, 더 잘되라고 미리 지혜나 요령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도 지나치게 장황하면, 참견과 잔소리로 들려서 마음 안으로 잘 스며들지 못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드는 생각은 깨달음이란, 스스로 마음을 열거나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인지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변화는 대개 어떠한 깨달음이 스며들 때 꿈틀거리는데, 깨달음은 누군가 말을 먼저 해준다고 해서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자신이 직접 느껴가며 의식이 생겨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요, 나를 변화시키는 동기가 되어준다.
그러니 아직 깨닫지 못한 자, 아직 의식하지 않는 자에게 지나친 책임감에 애써 이해시키고 바꾸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이다.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설령 안타깝게 보인다 해도 때가 스스로 수용할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은 시간이 되기도 하니까.
주변이나 내게 직접적인 물질적, 정신적 피해 내지 위험을 주는 선이 아니라면, 상대방에 대한 답답함이나 철없어 보이는 모습은 스스로 열리고 깨달을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지 싶다. 종종 무신경 모드로 전환해서 지켜봐 주는 것이 더 순조롭게 풀리는 때도 있으니까. 내 자식이란 이유로, 내 조직원이란 이유로, 내 부모란 이유로, 내 사람이란 이유로 지나친 걱정과 책임감으로 꼰대처럼 굴레를 만들어 시시때때로 잔소리해가며 기다림 없이 변화를 주려고 애쓰는 건 겪어보니 그리 효과적이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외려 역효과만 더 일으킨다. 지나친 의무감, 과한 책임감은 삶과 관계를 딱딱하게 만들고, 무례한 간섭과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정선 내에서 과하지 않게 애정을 주는 것이 자생력을 키우기엔 더 적합한 환경일 수 있다. 더 주고 싶은 애정의 마음은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갈 수 있게 한 걸음 뒤로 떨어져 묵묵히 지켜봐 주는 기다림으로 대신해주는 일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세월을 겪고, 시간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는 삶의 배움도 있으니, 지나치게 앞서서 사사건건 참견하며 가르치려 들고, 훈수를 둘 필요는 없지 싶다.
딱딱하고 지나친 방식으로 취하기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되고 문제가 커지는 일들이 많아진다. 명백하게 자신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불편감을 보인다면 그런 일은 스스로의 태도를 돌아보고 수정해가면 될 일이고, 어느 타인에 의해 여러 사람이 불편감을 느낀다면 무례한 침범일 수 있다는 사실만 기분 상하지 않고 알아챌 수 있게 가볍게 툭 치는 정도로 언급만 해줘도 대개 무리 없이 상황이 해결된다.
삶은 결국 각자의 여정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 이외는 대신 살아주고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며 한 시기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게는 시간이 있겠지만, 서로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일지라도, 상대가 들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무례한 침범이 될 수 있다. 위험한 수준의 선을 넘으려 한다거나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제 속도로 느끼고 깨닫고 배우고 성장해갈 수 있게 방목해 주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결국 깨달음은 각자의 시간 안에서 직접 해내야만 하는 몫이기도 하니까. 마음이 과한 것은 애정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저 무례한 침범을 즐기는 것뿐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