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라 비기독교 신자임에도 관심이 끌려 사놓았던 책이다. 그런 책을 잘 읽힐까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지난 5월에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초반부쯤에서 중단하고야 말았다. 책의 전개과정에 적응을 못한 면도 있었지만, 5월 말부터 서서히 뭔가 평정심을 잃어가는, 슬럼프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음을 기약했던 것이다.
이후 맥이 좀 풀려버려 그저 넋 놓고 TV만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더 크라운 (The Crown)'을 보고 있길래 함께 시청하기 시작했는데, 보다 보니 점점 이 드라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시즌 1에서 시즌 4까지 전체 40여 편을 한달음에 섭렵해버렸다.
'더 크라운'은 현존하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주요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과 갖가지 상황을 드라마 형태로 보여주는 시리즈물이다.
백부인 에드워드 8세가 사랑을 선택하면서 왕위를 내려놓는 바람에 그의 동생인 부친이 새로운 왕이 되면서, 본인 역시 왕위 승계 서열 1위의 삶으로 급변한 10대 시절부터 1990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가 실각하는 시기까지 대략 50여 년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주요 주변 인물로는 선왕인 부친, 부친의 선왕인 백부 에드워드 8세, 모친,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 에든버러 공작, 동생인 마거릿 공주, 네 자녀 중 첫째인 찰스 왕세자와 둘째 앤 공주, 남편 필립의 숙부인 마운트배튼 백작, 재임기간 동안의 총리들 중 관계가 깊었던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해럴드 윌슨(노동당, 2회 격대 재임), 에드워드 히스, 마거릿 대처, 그리고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찰스 왕세자의 정부 카밀라 파커볼스 등이 시즌 1부터 시즌 4를 관통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요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각 시즌당 10회씩 총 40회를 회당 50여분 분량으로 하여, 영국 궁정의 내밀한 모습과 당시 영국의 사회상 그리고 중요한 국면의 정치상황 등 사실상의 영국 현대사가 여러 그림으로 펼쳐진다.
- 남편과의 순탄치 않았던 초기 10년의 결혼생활, 매주 1회씩 진행되는 총리 접견과 이 속에서 오가는 긴장과 대립 그리고 협력들, 시종일관 빚어지는 여동생 마거릿 공주와의 의도치 않은 갈등과 언니로서의 연민,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묘한 경쟁심리, 불편했던 대처 총리와의 관계, 찰스와 다이애나의 파국의 과정,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 등 자식들의 불행한 가정사, 결과적으로는 국민들과의 접점을 늘리게 되면서 군주제 지속에 도움이 된 왕과 왕실을 향한 매서운 비판들 등.
'더 크라운'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얼마 전에 사망한 남편 필립에 대해 새로운 내용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저 여왕의 든든한 부군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장남 찰스에 대한 복합적 심리의 발현과 이에 따른 완고함 및 엄격함, 여왕의 남편이자 왕자와 공주의 아빠이면서도 엄연히 아내의 신하이자 왕위 계승 서열에서 비껴 난 자로서의 한계와 갈등, 불우했던 어린 시절(그리스 왕족에서 도망자이자 망명자 신분으로의 전락, 나치 고위 간부들과 결혼한 누이들, 가장 좋아했던 누이의 항공기 추락 사망,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어머니 등)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 결코 순탄치 않은 생을 살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드라마를 보면서 조금 아쉬웠던 점은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혼과 이후 다이애나의 죽음 그리고 이에 대한 엘리자베스 2세의 반응까지 담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였다. 오래전 다이애나 빈의 죽음과 엘리자베스 2세의 반응을 메인 테마로 다룬 '더 퀸'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는데, '더 크라운'이라면 이 대목을 어떻게 다뤘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부디 시즌 5가 제작되어 이를 흥미롭게 다뤄주기를.
평소 영국에 대해서는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정치나 역사 그리고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그래서 지금도 PMQs(Prime Minister's Question, 일종의 대정부질문)을 유튜브를 통해서 간간히 챙겨본다. 물론 이들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총리와 야당 의원 간 '1:17'의 전쟁 같은 싸움 분위기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국정 최고 결정권자이자 최종 책임자가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과 직접 문답을 진행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기에.
몇 해전 중앙일보 고정애 기자가 영국에서 장기 체류하는 동안의 단상을 담은 책, '영국이라는 나라'를 읽은 적이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면서 말랑말랑하게 영국의 역사와 제도 그리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이 담겨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관계와 정서, 보수당-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상황, 왕족과 평민 간의 신분제도, 나라 곳곳의 소규모 운하 등 다양한 면들이 적절하게 스케치되어 있어서 영국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가볍게 들춰보는 책이다.
영국은 2002년 여름, 인생 첫 해외 배낭여행을 통해서 1주일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런던, 옥스퍼드, 윈저성 등지를 다녔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제는 혼자가 아닌 셋이 되어 2019년 여름 아내와 아이와 함께 4박 5일 일정으로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런던 타워브리지를 중심으로 옥스퍼드와 그리니치 등지를. 그렇게 같은 땅에서 17년의 간극을 살펴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삶의 시간도 비교해보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다시 영국 여행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녀보고 싶다. 그냥, 이곳은 로망이다.
음... 아마도 이러한 그간의 관심과 경험이 쌓여서 '더 크라운'에 비교적 흥미롭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메릴 스트립이 대처 총리 역할로 열연한 '철의 여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더 크라운' 시즌 4 후반부 분량을 차지했던 대처 총리의 활동 및 여왕과 대처의 관계는 그와 오버랩되는 면이 여럿 나와 이 역시 '더 크라운'을 보는데 흥미를 더해주었던 것 같았다.
아울러 7년 전, 토니 블레어 총리의 자서전(토니 블레어의 여정-제3의 길부터 테러와의 전쟁까지 블레어노믹스 10년의 기록)이 나왔을 때 바로 구입하여 3분의 1 정도를 읽고서 중단한 적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이 책을 다시 들춰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영국 노동당의 금과옥조 같은 '산업 국유화'를 당헌에서 삭제하는 당 현대화 작업을 통해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18년의 만년 야당 지위를 종식하면서 새롭게 13년 집권을 이뤄낸(토니 블레어 10년, 고든 브라운 3년) 과정을 상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더 크라운'은 엘리자베스 2세를 중심으로 사실상의 영국 현대사를 담은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소설이든 영화든 역사적 사실이 중심이 될 경우에는 그것을 역사적 다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다분한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한편, 드라마의 핵심 인물뿐만 아니라 중심인물이 대부분 현존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이 드라마를 볼 때 과연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찰스, 파커볼스, 왕세손 윌리엄과 해리 등 분명 이 인물들에겐 굉장히 불편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국가적 상징으로서 평생을 공적인 지위로 살아간다는 것도 정말 보통 일은 아닐 것 같다.
※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책 이야기 (번외)'로 그려본 것은 이 역시 영상물이기 이전에 글에 기반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였다. 분량도 40회라는 적지 않은 수준이기에, 그 기반은 역시 글일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