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진보라고 할 때 개혁성과 새로운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그런 정신을 높이 산다. 그런데 조국 법무부장관 사태에서도 지켜보았지만 진보주의자들이 처신은 그들의 개혁적 기치와 정반대로 드러날 때가 많았다.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에서 당사자는 의혹이 눈덩이처럼 부풀어나도 일언반구 성명서하나 발표하지 않고 흔적도 없이 도피했다. 끈질긴 언론의 추적으로 정체가 발각되자 그제야 나타나서 의혹에 대한 정확한 해명도 내어놓지 않고 오리발만 내밀었다.
또 서울시장의 성폭행 의혹 보도가 터져 나오자마자 당사자는 증발해버렸다. 세간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가운데 자정이 지나자 단신으로 속보가 터져 나왔다. 결국 자살로 생을 종결해버렸는데 이번에는 언론 방송들의 자세가 달랐다. 연이은 지도자들의 자진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당당하게 출사표를 던졌던 첫 발걸음을 내닫는 심정으로 당사자들은 떳떳이 자신들의 행적을 설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지도자로 표를 내몰아준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중요하고, 살아남은 피해자의 인권도 중요하다. 죽은 자의 삶을 우상시하며 추앙하는 만큼 그의 어두운 이면도 명백히 밝혀져야 피해자의 남은 시간에 대한 속죄가 될 것이다. 한편 죄는 죄대로 물으면 될 것이고, 나름대로의 치적과 업적 또한 그 의미를 굳이 퇴색시킬 필요는 없다. 죄를 묻는 만큼 그의 공로도 인정하면 된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몰상식도 벗어던지자. 피해자가 무슨 잘못인가. 거대한 권력에 탄원도 했지만 누구 하나 발 벗고 나서서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도 서울시의 부끄러움이다. 조직의 정당성은 정직함과 겸손으로 판단돼야 한다. 남에게는 추상 같이 대하면서 자신들에게 춘풍으로 대한다면 어찌 정의가 서겠는가.
특히 인권변호사로서 명망이 높았던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이 변호했던 그 죄목으로 단죄를 받는다면 이런 역설에 소시민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만다. 진보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깨끗한 깃발과 구호를 자랑하기에 앞서 도덕성의 회복이 시급하다. 영어 ‘self control’의 뜻풀이는 스스로의 절제를 말한다. 절제는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처신이 중요하다.
보수의 특징이라면 기존 것의 좋은 전통의 고수에 있다. 예를 들어 전후 나라의 모든 기반이 무너진 데서 경제개발의 기치를 내걸고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고 “잘 살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새마을 운동과 새 마음 운동으로 전후 독일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보수는 기존 것에 개혁성을 더하지 못하고 부정부패와 기득권 유지로 지금 낭떠러지에 처박혀 있다.
필자는 선거여왕이라 불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렇게 무능하지도, 그렇게 잘못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외려 현정부보다 깨끗했지만 탄핵의 폭풍이 너무 순식간에 불어닥쳤을 뿐이다. 추종자들과 더불어 보수의 가치를 확실히 각인시키지 못했고, 보수의 외연을 넓히지 못한 것, 탄핵정국에서 너무 솔직했던 것, 자유한국당이 결사항전으로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패착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비가 그치면 빨랫감은 잘 마를 것이다. 흠뻑 젖은 빨랫감처럼 보수는 더러운 모든 것들을 씻어내고 새롭게 도약하길 바란다. 정당의 이름을 바꾼다고, 사람을 교체한다고 보수가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보수의 가치를 다시 리빌딩한다면 그 안전하고 튼튼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다시 환호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진보가 가리려 해도 허위와 가식으로 망한다면 보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을 때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