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산에 태어나 여태 살면서 정주영 회장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것이 회환으로 남을 만큼 그의 저서 「이 땅에 태어나서」는 개인적으로 감명을 받았고, 몇 날 며칠에 걸쳐 책을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나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창궐해 모든 나라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의 전개에서 한순간 생존으로 내몰리듯 불안하고, 기도하듯 간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날의 행보가 아닌가. 이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는 나에게 “꿈꾸고, 도전하고, 개척하라”는 용기를 던져주며 지친 일상에 내동댕이쳐 있는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됐다. 글이 읽히지 않고 문학이 가치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며칠 동안 손에 그러쥐었던 책 한권이 이렇게 내 마음을 감동으로 휘저어 놓으니 「내 인생의 책 한권」을 만난 기쁨에 이제 나만의 독후감을 펼쳐놓으려 한다.
「이 땅에 태어나서」를 읽은 소감을 적어나가면서 나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가나안에 들어갔던 모세가 야훼 하나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던 것에 착안해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7가지(7계명)로 나누어 이해하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첫 꼭지의 ‘글을 시작하며’에서 먼저 자신의 아버님을 기린다. 보고 싶고, 애틋하고 절절한 이름인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3시간 반이나 걸리는 넓고 광활한 서산농장을 소개한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 뼘 한 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뒤늦은 선물이다”라고 소회를 털어놓는다. 장손인 맏아들이 농사짓는 것을 뿌리치고 도시로 도망가는 것을 세 번이라 찾아와 막아섰던 아버님은 “농사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가족이라도 건사한다”고 부탁했으니 옛날 우리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첫째로 가족, 아버지의 이름으로」로 정해보았다. 그의 아버님은 참으로 가난했지만 불철주야 근면과 성실로 농사지어 가족을 부양했다. 그 아버지를 보고 따르며 정주영 회장은 부지런함을 물려받은 천상 농사꾼이었고, 근면과 성실로 이 나라의 수많은 아버지를 먹여 살리는 기업가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광복과 건국, 그리고 느닷없이 발발한 6.25전쟁과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이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관통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또 그런 가시밭길 고난과 필설 할 수 없는 근현대사가 정주영 회장을 단련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살처럼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현대그룹이라는 표적에 정확하게 적중하였음을 알게 된다. 「둘째로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로 기술해보는데 그 일화를 소개한다. 일제강점기에 ‘아도서비스’를 차려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했던 정주영은 어느 날 갑작스런 화재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사채업자 오윤근씨에게 사정사정해서 다시 신용으로 돈을 빌렸고, 사업에 재기했다. 그럼에도 정주영과 동료들은 일제에 ‘아도서비스’를 하루아침에 빼앗겨 버렸다. 둘째 인영이와 셋째 순영이 까지 징용으로 끌려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황해도 수안군의 홀동금광에서 평남 진남포 제련소까지 옮겨지는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하청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광의 관리자들에 2년 남짓 죽을 만큼 냉대와 무시를 당했다.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어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돌아섰는데 그것이 천우신조였다. 석 달 후 일본이 패망했기에 까딱 잘못했으면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갈 뻔 했던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를 하늘이 도우셨던 것이다.
「세 번째는 꿈과 깡과 꾀와 꾼」이다. 정주영 회장처럼 꿈에 미친 사람이 있었던가.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꿈꾸는 요셉이 나오는데 어릴 때 요셉은 꿈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게 된 까닭은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모두 요셉이 말했던 꿈대로 됐기 때문이다. 100% 꿈 꾼대로 되니 안 믿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처럼 정주영 회장은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던 자동차 국산화를 이뤄냈다. 또 모두가 안 된다고 손사래 치던 현대조선소도 건조와 동시에 선박수주를 했고, 세계조선사 최초로 조선소를 완공하면서 선박을 인도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의 ‘깡다구’를 누가 따라서 이겨낼까. 그의 꿈은 그의 깡과 동전의 양면처럼 늘 같이 붙어있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대안제도를 정착시키라고 꾸준히 제안했고, 1967년 소양강댐 공사에서 대안공사를 이끌어내 그의 꾀 많음을 증명했다. 그의 꾀는 처음에 무시당했고, 모욕당하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기술이 앞섰던 일본공영이 소양강댐을 중력댐으로 설계해둔 것을 사력댐으로 제안했는데 일본관계자의 무시와 조롱만 아니라 건설부와 수자원개발공사도 욕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제안이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는데 포병 출신의 박대통령은 폭격을 당하더라고 “흙과 돌 모래가 섞이는 사력댐이 콘크리트댐보다 더 좋은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일이 정주영 회장의 꾀대로 진행됐고, 나중에는 일본공영 구보다 회장의 정중한 사과와 더불어 30%의 공사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깡이 없고, 꾀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담대한 꿈과 흉내 낼 수 없는 배포(깡)와 풍부한 상상력(꾀)은 그를 세계적인 프로페셔널로 인정받는 꾼이 되게 했다.
「네 번째는 애국애족」이다. 나의 아버지는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다 청송의 주왕산에서 조그만 숯 공장을 했고, 울산에 공단이 조성되던 1962년에 마침내 울산에 정착했다. 부두노조의 근로자였던 아버지는 짐자전거를 타고 출근했고, 술이 불콰해진 얼굴로 퇴근했는데 내가 세숫대야에 아버지의 발을 씻겨드리면 아버지의 얼굴은 만면희색이 되곤 했다. 내가 지금 그때의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무게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소시민들은 범죄자가 되지 않고 나라에 꼬빡 꼬박 세금내고 가족 건사만 잘해도 다행이고 알게 모르게 애국애족을 한다. 정주영 회장은 당시 인구 4~5만 명의 울산이 인구 100만 명이 유입되게 근로자들에게 보람찬 일터를 제공했고, 끝없이 일거리를 수주해와 근로자들이 월급으로 생활하게 했고, 나라에 세금을 내 국고를 든든하게 했다. 현대미포조선소를 지나가면 공장외벽에 큰 글씨가 돋보인다. “나라가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길이며 내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다.” 이보다 더 멋진 글귀가 어디 있으랴. 오죽하면 외국잡지에 울산시가 현대시로 잘못 표기될 만큼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세계적인 ‘현다이’가 아닌가. 「다섯 번째는 해외개척과 수출에 목숨 걸고」이다.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는 해외개척의 일대기이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지을 때 미포만의 공장부지에 100년 만의 물난리를 만나 공장이 진흙탕에 빠지고, 기계와 부품들이 물에 떠내려가고, 근로자가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고 하면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이 난리를 수습하는 과정과 그 후 포드자동차와의 업무협약과 정부의 자동차 관련 사업 구조조정 등 굵직한 현대사가 현대자동차의 역사였다. 사업을 하면서 정주영 회장은 일찍부터 국내산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수출에 목숨을 걸었다. 현대의 첫 자동차 포니로부터 각종 승용차와 트럭 버스 등을 제작해 수출했다. 또 1965년 현대건설은 선진 16개국 29개 업체를 물리치고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의 노하우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졌다. 박대통령은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교통과 물류의 충격을 받고 돌아와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고, 현대건설이 주축이 돼 많은 반대와 불가능한 모험이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공기를 단축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정주영 회장은 현장에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공사현장을 지휘했다. 또 해외자본을 투자받는 것은 물론 선진 해외기술과 경험을 국내에 이식하고, 또 국내의 기술과 인력을 해외에 재투자해서 사업의 한계를 극복해온 것이 현대의 해외개척의 여정이었다.
「여섯째는 착한 리더의 면모」이다. 드라마틱한 책읽기를 하는 도중에 6남 2녀의 장남 정주영 ‘형님’의 면모를 읽으면서 애틋함에 눈시울을 적시었다. ‘아우 신영이’라는 소제목의 차례에 나오는 이야기다. 16년 연하의 아우가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고 아홉 살에 송전소학교에 다니고, 여느 형제들과 꼴 베어 소먹이고 벼 베고 가마니 짜면서 자랐다. 보성중학교에 입학한 신영이는 문예반원으로 교지를 만드는데 참여했고, 철학을 논했던 총명한 아이였다. 다정다감하고 명랑하고,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공부 욕심 많았던 동생은 서울법대 대학원시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가 돼 국회에 출입했다. 그때 젊은 엘리트 기자들의 연구 친목 단체인 ‘관훈클럽’ 회원도 됐다. 그 후 아우는 독일 유학에서 결혼도 했고,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국내에 많은 기사를 송고했다. 형으로서는 뿌듯한 자랑거리였고 기쁜 소식이었다. 어느 날 아우의 비보를 접했다. 나는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국내에 머물던 계수씨는 어쩔 것이며 또 남겨진 아이들은...’ 나는 아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흘 동안 회사에 출근을 안했다. 내 평생 단 한 번의 장기휴무인 셈이다.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 온 아우의 시신은 ‘관훈클럽’ 회원들이 운구했고, 청운동 자택에서 아우의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계수씨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독일교회에서 결혼한 아우도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녔었다. 나는 아우의 장례를 마치고 처음 계수씨가 교회로 예배를 보러가던 날 아무 말 없이 집사람과 함께 계수씨를 따라나섰다. (회사에서나 사회에서 늘 앞장서던 리더가 남편을 잃은 계수씨를 위해 동부인하고 7개월 가령 교회를 같이 다닌 장면이 인간적이었다. 그래서 따스하고 좋았다.) 1977년 ‘관훈클럽’에 아우가 못 다한 뜻을 이어달라고 순수한 기금출연을 제안했다. 그래서 태동한 ‘신영연구기금’은 언론인들의 연구와 저술 및 해외연수를 지원하며 영리가 아닌 순수목적의 귀한 책들을 출판해오고 있다. 아우가 못 다한 논문은 스승의 마무리 작업을 도움 받아 아우 신영이가 세상을 뜬지 20년 만에 박사가 됐다. 젊은 날 혼자됐던 계수씨는 남겨진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 다 장성해 결혼해 일가를 이루었다.
정주영 회장의 책을 읽으며 내가 평소에 느꼈던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 신기했다. 그것은 사농공상의 논리에 관한 것이다. 앞서 내가 울산부둣가의 근로자로 가난하게 살았던 나의 아버지에 대해 간략하게 적었던 것은 오징어잡이 배에 탔어도 신통하지 않았고, 농사를 지었어도 생활이 어려웠던 아버지가 그나마 근로자로 회사에 일하면서 최소한 가족건사는 됐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같이 맞벌이해서 그나마 5남매를 잘 키워냈다. 우리 가족들 대부분이 울산의 공장에서 근로자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앞에서 적은대로 회사가 설립돼 공장이 들어서니 근로자로 입사만 해도 생활은 펴진다는 것이다. 10여 년 동안 신문판촉사원으로 일하며 현대중공업이 지척인 동구를 드나들었을 때 5층짜리로 즐비했던 만세대가 허물어지고 고층아파트가 올라가는 것도 보았고, 오토바이가 주로 세워져있던 좁은 골목길에 승용차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이제는 주차자리도 없을 지경이 아닌가. 한국인들이 먹고 살만해서 3D 업종이라고 무시했던 일자리에는 수많은 해외근로자들로 차고 넘친다. 그런 일자리조차 못 구해 전전긍긍했던 우리 선배들의 시대가 불과 한 세대 전이다. 정주영 회장은 노사분규에 대해서도 말한다.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은 회사에도 좋고 근로자들도 좋은데 너무 심한 노사분규는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힌다. 물론 시대상황이 예전과 다르고 근로자들의 지적수준이나 능력도 출중해졌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도는 이전의 선배들만은 못할 것이다. 가난한 선배들은 가족 부양하는 일자리가 주어진 것만도 감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정부주도로 경제가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정경유착을 지시한 지도자와 부정부패도 남 탓할 일 아니고 기업들이 자성할 일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며 경제를 이끌어온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자영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종업원 10명만 거느리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장이 잘되면 종업원이 잘되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운 지금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가게에 임대 딱지가 붙는 것을 보면 기업가와 실업인들이 이 나라 경제의 버팀목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짧은 독후감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아산 정주영 회장의 도전과 개척정신이다. 일반인으로서 그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흉내라도 내는 것이 언필칭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큰 사람은 하늘에서 내는 법이다. ‘작은 복은 내 노력으로 챙기고 큰 복은 하늘에서 챙겨주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 시대에 ‘왕회장님’으로 불리는 정주영 회장의 책을 꼭 찾아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기술할 「일곱 번째는 아산사회복지재단과 진정한 부자」에 관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을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들인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10%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돈 벌어도 일하느라고 쓸 시간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생전의 청운동 자택도 그리 넓지 않았고, 현대자동차의 새 차를 타면서도 ‘그랜저나 다이너스티 차량을 내가 타도 되나’ 되뇌었을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은 모아둔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생각을 골똘히 했고, 결론 끝에 아산사회복지재단이 태어나게 됐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생겨난바 의료사업, 사회복지와 연구개발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으로 발족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듯이 구제와 복지 등 나누고 베푸는데 힘써서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포드재단에 버금가는 아산재단을 꿈꾸었다. 책의 끝부분에는 한평생을 같이 해로했던 아내에 대한 헌사이듯 참 검소하고 부지런했던 아내에 관한 일화가 잔잔하면서도 감동을 전하며 여운을 남긴다. 소련의 고로바초프와 대화하고 경제에 대한 직언을 한 이야기, 북한 고향 땅을 직접 방문하고 금강산관광개발을 일평생 과업으로 이루려했던 이야기, 우리나라 역대지도자들에 대한 연민이나 따끔한 질책 등 왕회장의 이야기는 책을 통해 직접 읽어보면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현대그룹을 일궈내며 국가발전에 혁혁한 공로로 이바지한 정주영 회장의 서거 20주년을 추념하면서 글을 맺는다.